▲영화 <간첩>의 포스터
롯데 엔터테인먼트
"싸고 맛만 좋구만, 그거 다 연출이야!"
'소가 픽픽 쓰러지는 그 동영상 못봤냐'고 동료들이 묻자, 남파된 뒤 어린 딸 키우며 복비 10만 원 때문에 머리 끄댕이 잡기도 불사하는 부동산 중개인 강대리(염정아 분)가 내뱉는 말이다. 역시 남파된 뒤 시골서 소 기르다 촛불집회를 주도했다는 우대리(정겨운 분)도 연출된 시위 장면에서 가스통에 불붙이며 과격시위를 선동하는 희화화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코미디지만 전혀 웃기지 않는, 어찌보면 '진짜 웃기는' 장면들이다.
'간첩질 10년이면 작전도 생활이 된다!'는 홍보 문구에 '생활 밀착형 리얼 첩보극'이란 부제를 달고 나온 영화 <간첩>(각본·감독 우민호)은 '간첩신고보다 물가상승이 무서운' 남파간첩들에게 10년 만에 암살지령이 떨어진 뒤 벌어지는 소동을 따라간다.
"그래도 그때는 신념도 있었고 자부심도 있었지." 왕년에는 '조국통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이제는 노후대책으로 고민하며 "박통 때가 좋았어"를 외치는 '신분 세탁' 전문 윤고문(변희봉 분), 한때 눈이 맞아 정분이 났다가 헤어진 뒤 재회해 서로 으르렁거리는 '로케이션 책임' 강대리와 '첨단기기 해킹' 담당 우대리는, 가짜 비아그라 밀수 판매 등으로 집 장만에 매달리던 '작전 브레인' 김과장(김명민 분)의 긴급호출 '목란이 폈다'는 휴대전화 문자를 받고 오랜만에 모여든다.
'지령전달 및 암살' 전문으로 극중 '2001년 10월 김정일의 처조카 권성만 암살' 때 내려온 뒤 10년 만에 비행기 타고 다시 잠입한 최부장(유해진 분)과 그 일당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살기 바빠 헐렁해진 다른 남파간첩들과 달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1983년 버마 아웅산 폭파사건, 1996년 강릉 잠수함사건 등에 대한 당시 자료를 보여주며 북한을 호전적인 집단으로, 1997년 황장엽 망명사건 등을 비추면서는 북한 체제가 불안정하다는 주장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또한 극중 텔레비전에서는 "인민들은 굶어 죽는데 전쟁 준비에만 몰두"한다며 북한을 비난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공작금 좀 받았냐'는 동료들의 질문에 김과장도 "3년전까지만 해도 좀 있었는데, 요즘 (그쪽도) 힘들잖아요"라며 얼버무린다.
이들이 암살하려는 대상도 6자회담을 진두지휘하다 체제에 환멸을 느껴 망명했다는 북한 외무성 부상 리용성. "6자회담은 북한당국이 시간을 끌기 위한 사기극에 불과"하다는 방송멘트가 그의 망명에 힘을 실어준다.
영화는, 이런 북한이 한국사회의 불안을 꾀하고자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선동했다는 요지로 불붙은 가스통과 광우병쇠고기 수입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을 한 장면 안에 밀어넣으며 관객들에게 웃어보라고 한다. 이런 설정은 2000년대 초 당시 45억 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붓고도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참패했던 시대착오적 영화 <이중간첩>(감독 김현정, 2002)과의 차별화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고 냉전적 대결구도에 집착하며 시종일관 무거운 척만 하다 침몰해버렸던 <이중간첩>. 영화 <간첩>에는 <이중간첩>의 무거움은 웃음으로 날리고 빈 곳은 <의형제>(감독 장훈, 2010)의 액션으로 채우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간첩>이 선택한 전략은 생활전선에 찌든 남파간첩들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와 총격전을 동반한 도심 추격장면이다. 하지만 생뚱맞은 발상의 영화 <간첩>은 웃기지도 못하며 반공물의 틀 역시 벗어나지 못한다. 반공물이라는 평가는 제쳐두고라도 촛불집회를 남파간첩의 가스통 선동과 일치시키려는 장면과 함께 미국산 쇠고기 홍보 아가씨를 자처하는 강대리의 거듭되는 거친 대사들 앞에 코미디는 시작부터 휘청거리다 결국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남파간첩들과 국정원 요원들이 벌이는 도심 추격전 역시 어설프기는 매한가지다. 영화 <간첩>은 구시대적 반공드라마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박진감 넘치는 도심 추격전을 보여줬다는 평을 얻으며 2010년 상반기 500만 흥행을 달성했던 <의형제>의 도심 추격전을 여러모로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것에 비해 전체적인 구성은 헐거운데다 카메라 들고 찍기는 과녁을 찾지 못한 채 어지러우며, 결투의 합은 조잡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강대리가 보여주는 모성본능 또한 도식적이다 못해 "왜 이러는 걸까요?"를 내뱉게 한다.
대중들의 정서와 동떨어진 정치적 주장만을 노골적으로 주입하려는 코미디 영화 <간첩>의 흥행은 어찌보면 시작부터 힘들었는지 모른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영화의 형식적 완성도에도 혹평이 쏟아졌던 <간첩>.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간첩>은 추석연휴가 지난 10월 2일까지 110만 관객을 간신히 넘겼다. 그나마 배급점유율 2위의 대기업계열 영화배급사가 자사계열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을 내세워 9월 20일 개봉 당시부터 전국에서 무려 533개 스크린을 몰아준 덕으로 보인다.
하긴 남북관계를 빙하기로 만들어버려 반북·반공의 목소리만 목청을 높이는 현 정부 아래서 돈도 벌어야 하는 상업영화가 건강한 목소리를 내다가는 말그대로 극장 안으로 가스통이 굴러드는 상황에 직면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 <간첩>이 보여준 도저히 상업적 고려라고 변명할 수 없을 정도의 노골적 정치색은 대중의 정서와 공감하기는커녕 거스르고 마는 우를 범했다. <간첩>은 정치적 소재를 담은 코미디는 역시 쉽지 않음을, 더 나아가 때로는 정치적 소재는 차라리 피하는 것이 나음을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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