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끝난다"(The Legend Ends)웬만한 영화 홍보 문구의 자신감은 귀엽게 봐줄 수 있어도 이번 건 좀 세다. 1, 2부격인 <배트맨 비긴즈>(2005), <다크 나이트>(2008)가 이미 "전설"이었으니 마지막 편을 놓치지 말라 이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대놓고 거만한 자세가 독특한 영화다.영화는 4년 전 국내에서도 놀라운 흥행을 기록하며 마니아층을 낳게 했던 <다크 나이트>의 끝에서 시작한다. 위기로부터 세상을 묵묵히 지켜내는 '어둠의 기사'의 진심을 몰라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잠적해버린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 분)은 배트맨 가면과 망토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대저택에서 두문불출한다. 그로부터 8년 후,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거짓 평화의 수면 밑에선 악의 세력이 꿈틀거리고, 여전히 내면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브루스는 자신과 고담시에 닥칠 위기를 직감하며 출정의 기로에서 고뇌한다. "시리즈 사상 최강의 적"이라는 베인(톰 하디 분)은 고담시를 절멸의 위기에 빠뜨리고 이를 막으려는 브루스와 격렬하게 충돌한다.볼거리 측면에서 본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떠드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다. 수송기에서 탈출하는 베인의 섬뜩함을 담아낸 도입부의 공중촬영 장면을 정점으로 영화는 더 이상 박진감을 상승시키지 못한다. 뉴욕 월가를 무대로 수천 명을 동원해 8개월간 준비했다는 경찰병력과 베인 일당의 대규모 격투장면이나, 실제 1만1000명의 엑스트라로 채워진 관중석을 배경으로 질주하는 유명 미식축구선수 하인즈 워드의 등뒤로 거대한 잔디운동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경기장 폭파장면도 예고편 동영상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하지 못한다. "최강의 적"이라는 베인과 배트맨의 대결 또한 <다크 나이트>에서의 조커(히스 레저 분)와의 대립구도보다 헐거운 느낌을 주는데, 특히 베인까지 시종일관 모든 대사를 배트맨과 흡사한 찌그러진 기계음으로 뱉어내며 서로 으르렁거리는 장면은, 저러다 목상할까 싶은 괴성으로 상투적인 말공격을 주고 받다 적당한 엎치락뒤치락 뒤에 뻔한 승부를 결정짓는 미국 프로레슬링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볼거리나 연출, 인물 설정 등에서의 빈틈이 아니라, 영화가 표방하는 노골적인 정치적 입장이다. 이미 정치적으로 충분히 노골적이었지만 살짝 눈치보는 척 정도는 해주던 전작 <다크 나이트>의 그것을 훌쩍 뛰어 넘는다. 웨인그룹 응용과학부서를 이끌며 최첨단 무기를 제작해 공급하는 루시우스 폭스(모건 프리먼 분)는 4년 전에 발표된 전작에서, 조커를 잡는다는 미명하에 브루스가 정부와의 비밀프로젝트로 거대한 휴대폰감청시스템을 구축해 가동하려하자 "3천만 시민들 감청은 내 직무가 아니"라며 맞서기도 했다. 대테러전쟁이라는 위선적인 국가전략수행으로 미국 국내외에서 비판을 독차지했던 부시 정권하에서 제작된 영화답게 당시 여론에 편승한 기민한 설정이었다. 반면 3부작 가운데 이번에 처음 등장한 캣우먼 역의 배우 앤 해서웨이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누구나 빠져들만한 완벽한 세계를 창조해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놀란 감독은 자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공간위에, 핵융합원자로의 코어를 탈취해 고담시를 멸망시키려는 절대악에 맞서 고독히 싸우는 '어둠의 기사'가 펼치는 자신만만한 이야기를 이제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펼쳐놓는다. 자신이 실제 악당이면서 동시에 경찰인 척 위선의 가면을 쓰고 망토를 펄럭이는 현실세계의 미국을 전작에서보다 더 솔직하게 비호하는 변호사라도 된 듯,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라는 미국의 핵심구호에 대한 열성적인 전도사라도 된 양 말이다. 감독은 작년 가을 세계 주요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미국 주요도시로 번져나갔던 월가 시위를 작심한 듯 비꼬기까지 한다. 베인 일당은 전면전을 선포하며 증권가를 습격하는데 세력을 키운 베인이 고담시를 장악하자, 기존 체제에 반발하던 시위대는 시가지를 휘젓고 다니며 약탈과 무차별 폭행을 일삼는다.<메멘토>(2000), <인섬니아>(2002), <인셉션>(2010) 등과 배트맨 3부작을 선보이며 "천재감독"이라는 찬사를 받아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그는 형식적으로도 전작에 비해 헐겁고, 내용적으로는 자뻑 구세주론에 더 가까워진 노골적인 정치색으로 '전설'을 끝내려 한다. 죽음을 무릅쓰는 배트맨을 바라보는 캣우먼의 목소리가 애잔하다. "이제 당신은 시민들에게 빚진 거 없어, 다 줬잖아.""다는 아냐, 아직은!"출격하는 배트맨의 시꺼먼 망토가 휘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