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네이크 모운>의 한 장면파라마운트 클래식
남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싫증을 느낄 때 개선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나아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자신의 동생과 함께 떠난 부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도시와의 모든 소통을 끊고 고립을 선택한 채 살아갑니다. 고립은 때로 위로와 평안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남자는 자신의 집 앞에 피투성이로 버려진 그녀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견디지 못해 마약과 술과 섹스와 고립을 선택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위태로운 생활 속에 블루스가 등장합니다. 그 소리는 아픈 영혼을 위로하듯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흐릅니다.
자신의 상처를 세상과의 고립과 차단으로 이끈 남자와 모든 것을 드러내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사랑받기만을 병적으로 갈구하는 여자. 상반된 둘의 관계는 시종일관 충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실은 아마 포스터를 통해서도 아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흑인과 백인, 어린 여자와 늙은 남자, 이 두 캐릭터는 어쩌면 세상에는 누구나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과도 같아 보입니다. 그것은 자식을 버리고 홀로 마트에서 일하는 여자의 어머니에게도 있었으며, 심한 정신적 장애로 총을 쏘지 못해 군대에서 쫓겨나게 되는 그녀의 남자에게도 있었습니다.
영화는 이들이 얽힌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다스리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들이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의지로 상처를 보듬을 수 있도록 만들어 갑니다. 남자는 그녀로 인해 창고 깊숙한 곳에 있는 기타를 꺼내 블루스를 노래하기 시작하고, 그녀도 그로 인해 자신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마약과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무절제한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블루스라는 음악이 조용히 자리 해 영혼의 평화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쇠사슬과 언제든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목사와 블루스.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진심어린 소통. 이런 것들이 영화 속 상처의 치유 방법이라면 현실에서는 어떤 것이 그것들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란 것을 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자신만의 상처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