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우승 확정 순간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 환호하고 있는 김상진 선수.
한국야구위원회
결국 5차전 선발 마운드에는 김상진이 섰다. 바로 닷새 전 조기강판 당했던 애송이 선발. 넉넉지 못한 계투 물량. 별 수 없는 선택이었고, 트윈스 팬들이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일단 한 숨 돌릴 차례라고 생각할 만 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예상대로 김상진은 선두 유지현을 볼넷으로 출루시킨 데 이어 도루까지 허용하며 흔들렸고, 서용빈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선취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트윈스 팬들은 다시 2차전을 떠올렸다. 곧, 줄줄이 투수가 교체되어 나올 것이고, 트윈스의 방망이는 춤을 추며 다시 몇 바퀴 타자일순을 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이종범과 이호성의 그림 같은 수비에 힘을 얻은 김상진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고, 3회에는 최훈재의 적시타로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4회부터, 김상진은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18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는 완벽한 투구를 이어갔다.
그 날 김상진이 허용한 것은 두 개의 안타와 두 개의 볼 넷. 한 점. 그것뿐이었다. 마지막 우승을 결정짓던 순간마다 선동열이 포효했던 마운드에서는 두 볼 발갛게 상기된 아기 호랑이가 서 있었다.
만 20세를 막 넘어선 나이에 기록한 한국시리즈 사상 최연소 완투승이었다. 드디어 깃발은 세워졌고, 팬들은 선동열과 조계현을 대신할 이대진과 김상진이라는 두 명의 에이스, 그리고 김성한을 대신할 해결사 이종범이 이끌어갈 새로운 왕조의 한 시대를 확신했다.
1998년 '왕조의 몰락', 그리고 찾아온 위암이듬해, 그는 121이닝을 던지며 3.87의 평균자책점으로 호투했지만 승리는 여섯 번에 그쳤다. 그리 나쁠 것도 없지만, 기대에는 많이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사람들은 그 해 갑자기 어수선해진 팀 분위기 탓이리라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이미 몸속에서 퍼져가던 암세포가 그 목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지는 못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목의 통증을 느끼며 2이닝 만에 자진강판 했던 김상진은, 그 해 가을 어느 날 저녁 식사 중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병원에서는 말기 위암 진단을 내렸다.
왜 항상 괴롭고 슬픈 일은 한꺼번에 닥쳐오는 것일까. 그 해, 2년 연속 우승의 주인공 타이거즈는 1984년 이후 처음으로 5위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모기업 해태가 부도를 맞으며 자금난을 겪기 시작했고, 공격력의 30%라던 이종범은 일본으로, 조계현, 이순철, 정회열은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유망주 안상준 마저 LG로 현금트레이드를 해야 했을 정도로 절박한 형편이었다. 그리고 몰락한 집안, 새 희망이 되어야 할 막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이듬해에는 마지막 에이스 이대진 마저 어깨부상으로 쓰러졌다. 최강의 전설 '해태 왕조'는 그렇게 쓸쓸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길어야 3개월이라던 병상에서 김상진은 8개월을 버텼다. 카메라 앞에서도 얼굴의 근육에서 힘을 풀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그는, '해태 과자 사먹기 운동'을 벌이며 안타까운 하루하루를 지켜보던 타이거즈 팬들의 촛불이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대와의,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 그러나 1999년 6월 10일 오후 3시 55분. 강남 성모병원은 22세 청년 김상진의 사망시간을 기록했다. 유언을 남길 틈도 없었던 절박한 싸움의 끝이었다.
어깨 수술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타느라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진흥고 선배 이대진은 이듬해 유니폼에서 7년 동안 달아 왔던 26번을 떼고 11번, 김상진이 달았던 숫자로 고쳐 달았다. 허무하게 떠나보낸 김상진을 등에 지고 기필코 재기하리라, 그래서 다시 한 번 짜릿한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을 선물하리라는 각오였다.
그러나 2000년 8승으로 재기했지만 다시 재발한 부상 탓에 2001년과 2002년, 두 해를 통재로 흘려보내고 돌아온 2003년에도 단 1승에 그치자 이대진은 김상진의 11번을 스스로 떼어냈다.
"상진이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는 없다"타이거즈 팬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그 이름 '김상진' 마지막 우승 후 10년, 돌아온 이종범은 은퇴설과 싸우고 있으며 7승으로 부활한 이대진은 보다 확실한 재기를 위해 또다시 칼을 갈고 있다. 타이거즈는 '해태'에서 '기아'로 변신했지만, 아직 전설의 호랑이 군단으로 깨어날 조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도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들이 김상진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따금 경기장 관중석에 걸리는 김상진의 얼굴이 요상하게 타이거즈 팬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이유다.
단 3년을 머물다 떠난, 그래서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하고 떠난 선수를 추억하는 것은 허탈한 일이다. 업적과 기록 대신, 그가 남긴 빈자리와 그가 가졌어야 하는 영광들을 허공 속으로만 곱씹어야 하기 때문이다.
찬란했던 타이거즈 왕조의 전설 맨 마지막 대목에 이름을 묻은 '아기 호랑이' 김상진. 다시 한 번 그 전설이 부활할 때에야 씻김이 될 한의 단편. 이대진과 이종범이 떠나기 전에, 그의 이름 위로 축포가 오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