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리버리"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마노엔터테인먼트
귀남은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의사가 되었다. 이만하면 자수성가의 모범 사례라 할 만한 존재다. 자신의 성취에 뿌듯해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초조하고 주눅이 들어 있다. 아내와 연애해서 결혼에 골인했고, 충분히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나가는 중이지만, 그는 부유한 처가에 대한 열등감을 여전히 간직한 상태에 마치 연옥에 갇힌 것만 같은 상태다. 게다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자 어디에도 드러내지 못할 속내를 몰래 품고 있기도 하다. 둘 중 누가 불임의 원인인지 진실은 베일에 가려 있다.
우희는 소위 사회적으로 말하는 금수저다. 집에 딸만 둘이다 보니 남자 형제에게 일방적으로 전 재산을 빼앗길 위험은 덜하지만, 언니에게만 다 간다거나 엉뚱하게 아빠가 기부라도 해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태생이 부잣집 딸인지라 막상 노동 같은 건 해볼 리 없이 부유한 배경을 전시하는 '인플루언서'로 스스로 규정하고 소일하는 중이다. 어떻게든 2세를 만들어야 하는데, 입양도 원하는 바대로 얻으려면 1년 넘게 기다릴 판이다. 게다가 아빠는 구세대답게 혈연에 대한 집착이 확고하다.
달수는 요즘 미디어에서 자주 언급하는, 의지는 박약한 데다 미래에 대한 고민 같은 건 1도 엿보이지 않는 청년세대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그의 초반 분량만 본다면, 대체 미자가 그의 뭘 보고 동거하게 된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딱히 그렇게 주저앉은 상태가 된 데에 관한 과거사도 딱히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게으르고 향상심이 부재한 존재일 따름이다. 생각 복잡한 미자 옆에서 귀남과 우희가 제안한 인생역전 기회에 표정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심함이 극한의 짜증을 유발하는 캐릭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계약이 성립되고, 생각이 복잡한 미자를 돌보며 그의 마음 속에 변화가 시작된다.
네 사람의 교차가 <딜리버리>의 핵심 요소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미자의 심리와 신체 변화일 것이다. 네 배우의 연기력이나 캐릭터 특질이 크게 차이가 보이진 않는데도, 제작진은 유독 미자에게만 혼자만의 순간들을 중요 국면마다 부여한다. 이는 넷 중에서도 핵심이 미자라는 증거다. 정이 생길 여지라곤 눈 씻어봐도 통 찾아볼 수 없던 달수와 미자가 대체 어떻게 만났는지, 어쩌면 미자 역시 공시생 타이틀 걸어놓고 무 대책으로 시간만 흘리다 도피성으로 상대와 만나고, 덜컥 임신해버린 것일지 모를 일이다. 본인이 나중에 독백하듯, 이건 사랑도 뭣도 아니고 그저 욕망과 질투로 점철된 삶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달수가 후반부에 보이는 급격한 변화와 비교해 천천히 하지만 물이 포도주로 본질이 바뀌듯 미자의 시간은 그를 변화시킨다.
여기에 추가될 기능형 캐릭터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거대한 실체이자 흑막 그 자체일 존재다. 바로 이 사단을 불러온 원인유발자, 우희의 아빠 '태식'이다. 사실 그의 본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네 사람이 좋든 싫든 감당해야 하는 손바닥 세계관에서 절대자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귀남이 늘 눈치를 보게 만드는 거대한 부를 움켜쥔 채, 생사여탈 권한을 쥔 것처럼 가족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자이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속에서 자식들을 경쟁시키지만, 결국엔 자기 핏줄에게 부를 세습하려는 재벌그룹 회장과 태식은 한 몸과도 같다. 넷이 서로 물고 물리게 만드는 부를 둘러싼 동상이몽은 결국 그가 불씨를 당기고 기름까지 부은 결과인 것이다.
인간의 물신화-상품화를 극명하게 구현한 묵시록적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