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시간"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영화는 명백하게 지금 우리가 종속된 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에 스스로 자리를 놓는다. 하지만 절대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시대착오적 행보는 아니다. 지금 영화 속 농민들이 놓인 현재를 진단하고, 그들을 둘러싼 시스템의 위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균형감을 고수한다. 평택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 주변만 평택에 군사시설이 들어오며 개발되는 시류를 비켜나 있다고 증언한다. 도시인이라면 당장 개발특수 놓쳤다며 부동산 시세를 따질 텐데, 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저 스치듯 언급할 뿐이다.
소중하게 씨앗을 채집하는 그가 찬바람 피하고자 걸친 점퍼엔 '쌍용자동차'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고 주한미군 이전 관련 화제가 빠지지 않는다.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21세기 들어 평택이 어떤 공간으로 상징되는지 이해한다면 그저 들어간 이미지일 리 없다.
화순의 할머니들이 느리게 걷는 길가 주변엔 취지와 달리 적지 않은 폐단을 양산하는 태양광 발전 시설 반대 현수막이 엿보인다. 함께 작업하면서 여성 농민들은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에 대해 염려한다. 식자들의 담론이 아니라 그들이 체감하는 일상을 통한 체험담이라 더 묵직하게 꽂힌다. 예전에는 들깨꽃이 피면 이제 태풍이 더는 오지 않을 거라는 지혜가 통했는데, 온도가 올라가는 바람에 그런 상식이 이제 유효하지 않다는 자조다. 이제 그들이 평생 갈고 닦아온 세월의 축적된 경험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쑥국새가 울면 쑥이 날 때고, 꿩이 울면 취나물이 올라와 그걸 뜯으면 되었는데 이젠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작물과 종자 이야기만 해도 세월 가는 줄 모를 것 같은데, 카메라는 자연과 더불어 살던 이들의 고단한 삶을 포착하는데도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임금노동에 익숙한 우리 잣대로는 '노예'처럼 일하듯 보이는 여성 농민들의 일상은 자신이 원하는 노동을 원하는 조건에서 자유롭게 수행하는,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놓치지 않는 자율성으로 형상화된다. 풀베기는 한 달에 한 번 할 때도, 주마다 할 때도, 매일 해야만 하는 시점도 각기 존재한다. 그걸 숙지하는 건 자연에의 순응인 동시에 삶을 영위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성평등과 계급의 문제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이팥' 종자를 거두며 할머니들은 이게 양이 많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 부침개 해서 먹던 것이라 설명한다. 교과서에서 듣던 '구황작물'의 훌륭한 예시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 부자들은 안 먹고 아예 존재조차 모른다는데 그럼 빈부에 따라 먹는 게 다른 건가? 반문하듯 따라오는 여담은 그저 스치기엔 맵다.
평택 할아버지는 말수가 드물다. 그를 조명할 땐 유독 쓸쓸하고 뒷모습 위주로 포착한다. 우리가 상상하던 시골 할아버지의 어떤 고정관념과 그는 사뭇 다르다. 묵묵하게 제작진에게 밥 한술 뜨고 가라는 노인의 말투엔 외로움과 호의가 덕지덕지 묻어난다. 명백히 카메라는 사라져가는 세계의 표상으로 그를 상정한다.
'오래된 미래'의 씨앗들을 탐방하는 카메라의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