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옴니버스 영화는 단편영화를 대중적으로 관객에게 소개하기 위해 특정 소재나 배경에 따라 원래 별도 작업한 작품을 조합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처음부터 일관된 의도로 제작하지 않은 영화의 조합이기에 흥미로운 점도 많지만, 통합력은 아무래도 장편에 견주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실상 영화제에서 단편 상영을 보는 것에 가까운 체험이다.

다른 경우로 작가주의 감독들이 특정 기획 혹은 제안에 작업하는 사례가 있겠다. 앞의 경우와 비교하면 조금 더 규격화되고 공통 설정이 덧붙여지는 편이다. 이 경우엔 아무래도 대중적 개봉보다는 의뢰자 의도에 충실한 편이다.

극장 개봉을 전제로 하는 기획에서 옴니버스 장편은 여전히 낯설다. 영화는 130년 역사를 지녔지만, 관객은 여전히 수천 년 동안 축적된 문학적 서사에 친숙하다. 기승전결로 일관된 전개가 아니라 회화적 형태의 이미지 연결 위주 옴니버스 영화는 진입 턱이 있다. 이는 흥행 면에서 불안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지만 창작자에겐 도전하고픈 영역이다. 문학에서 물려받은 '이야기' 전형성을 벗어나 새 문법을 '따로 또 같이' 시도하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영화 <더 킬러스>는 국내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그런 도전기다.

같은 재료로 차별화된 맛에 도전하는 진검승부의 향연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스튜디오빌

영화는 4개 '세그먼트(Segement)로 분할된다. 약간 분량 차이는 있어도 존재감이나 역할 구분에서 크게 차별화되진 않는다. 4명 감독은 각각 제 몫의 재료를 받아 경연하듯 풀이한다. 그 향연을 관객은 코스 요리로 즐기고 식사가 끝나면 품평하게 될 테다.

세그먼트 1. 김종관 셰프의 < 변신 Metamorphosis >

첫 번째 메뉴는 <폴라로이드 작동법>,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조제>의 김종관 감독이 맡았다. 추격자에게 쫓기며 등에 칼이 꽂힌 채 남자는 바에서 눈을 뜬다. 이 세상 영역이 아닌 것처럼 온통 새빨간 기운이 감도는 바에는 바텐더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바텐더는 남자에게 칵테일을 건네고 마시자마자 동공이 열리며 알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된다. 제목 그대로 남자는 '변신'한다. 카프카의 단편소설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겪었던 그것과 차원이 다르게.

세그먼트 2. 노덕 셰프의 < 업자들 Contractors >

두 번째 메뉴는 <연애의 온도>와 <특종: 량첸살인기>로 입지를 다진 노덕 감독이 담당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원한을 품은 남자의 살인을 의뢰한다. 여자는 최대한 고통스럽게 살해해달라며 착수금 3억 원이 든 가방을 건넨다. 의뢰가 실행되면 3억 원을 추가 지급하기로 한다.

전문가로 구성된 '살인주식회사'와 의뢰인의 계약은 하지만 하청 및 위탁을 거듭하며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엉망이 되어간다. 6억 원짜리 계약은 1차 용역에 1억5천만 원으로, 실행을 맡긴 2차 용역에 3천만 원으로 눈 녹듯 규모가 줄어든다. 2차 용역이 재위탁한 3차 용역에 이르렀을 때는 선수금이 300만 원으로 줄었다. 3차 용역은 자신 못지않게 어리숙한 2명의 지인을 끌어들인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세그먼트 3. 장항준 셰프의 <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Everyone Is Waiting For The Man >

<라이터를 켜라>, <리바운드>를 연출했지만, 요즘 방송인으로 더 친숙한 장항준 감독이 오랜만에 앞치마를 두르고 팔을 걷은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가 메인 정찬이다. 1979년 늦가을 지방 어느 대폿집에서 모든 사건이 진행된다. 젊은 작부 홀로 있는 이 선술집에 신분을 숨긴 채 형사가 잠복 중이다.

그는 보름째 같은 시간에 이곳을 찾아 홀로 술을 마시며 주변을 탐색한다. 왼쪽 어깨에 수선화 문신이 있다는 정보 외엔 누구도 얼굴을 알지 못하는 연쇄살인범 '염상구'를 찾는 중이다. 형사의 '촉'으로 마침내 염상구가 이곳을 찾으리란 판단이 든 어느 밤,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세그먼트 4. 이명세 셰프의 < 무성영화 Silent Cinema >

1980년대부터 코리아 뉴웨이브의 일원으로 <개그맨>,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만들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형사>, < M >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 이미지 실험을 전개해온 이명세 감독이 참 오랜만에 연출로 명함을 내미는 4번째 메뉴는 <무성영화>다. 근미래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빈민과 범죄자, 난민, 온갖 추방자들은 도시 지하로 내려가 지하세계, '디아스포라 시티'를 형성한다. 해와 달을 볼 수 없기에 바깥과 단절된 시간이 흐른다. 사람들은 아주 작게 뚫린 틈새로 바깥 하늘을 엿볼 뿐이다.

단조로운 일상이 흘러가는 디아스포라 시티가 1000일째 되는 날, 두 명의 킬러가 이곳의 작은 바를 찾는다. 늘 저녁 6시 같은 자리에서 같은 메뉴를 시키는 신원미상의 제거 대상을 추격해온 것이다. 외부 침입자 방문에 바에는 긴장이 감돈다. 뭔가 터져야 숨 막히는 적막이 끝날 수 있다.

고유의 색을 입히는 삼위일체 재료와 양념들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스튜디오빌

4명 감독은 주어진 재료와 조건에 따라 자신 있는 방식으로 도전한다. 등에 칼이 꽂힌 남자, 청부살인을 의뢰하는 여자와 실행자, 모두 기다리는 누군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들이 각기 목숨 건 승부에 뛰어든다.

기이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조합을 받치는 뼈대는 3축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너무나 익숙한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살인자들'이다. 영화의 기본 설정이 이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닉 애덤스란 청년은 마을 식당에 갔다 누군가를 죽이러 온 청부살인업자 둘을 만난다. 하지만 대상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간다. 살인대상과 안면이 있는 닉은 그의 집에 가서 위급을 알리지만, 정작 그는 삶에 절망해 자포자기 상태다. 그런 모습에 실망한 닉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라는 단출한 내용이 1세기를 통과해 <더 킬러스>에서 한국적 배경을 가미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두 번째는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호크'(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다. 이 그림은 제각각 형태로 구현된다. 벽에 붙은 액자로, 실제 재현된 세트로, 표현은 다양하지만, 그림이 풍기는 영향력은 심대하다. 실은 호퍼가 헤밍웨이의 원작 '살인자들'을 읽고 영감을 얻어 창작한 결과물이기도 하니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대도시의 쓸쓸한 밤-길모퉁이 작은 술집-누군가를 말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아내는 기운이 영화 전체에 감돈다.

2020년대 한국에서 1920년대 미국 도시의 어떤 단면을 재구성하기 위한 세 번째 기둥은 영화 속 우주를 관객이 항해하는 데 가이드를 맡은 배우 심은경이다. 한국에서 촉망받던 연기자이지만, 일본에서 자신의 한계를 도전해 큰 성과를 거둔 그가 한국 영화계에 귀환하는 것만도 화제지만, 자신의 능력치를 실증하듯 <더 킬러스> 전편에 출연하며 천변만화 연기를 뽐낸다.

<변신>에서 마치 흡혈귀를 연상케 하는 신비로운 바텐더로, <업자들>에선 정반대로 얼치기 청부살인업자들에게 인질로 붙잡힌 가련한 신세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에선 1970년대 대중잡지 모델로, <무성영화>에선 삐삐 롱스타킹이 3차원에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의 바 점원으로 변화무쌍한 활약을 펼친다.

보기 드문 고수들의 합동 검무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스튜디오빌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스튜디오빌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스튜디오빌

원작을 4등분 나눠 맡았지만, 중견 감독들의 재해석과 지향에 따라 고유한 '살인자'가 등장하기에 옴니버스 <더 킬러스>는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4개 단편은 독자적 단편으로, 함께 보면 1편의 대작으로 해석하기에 무리가 없다. 전혀 다른 장르와 전개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건 동시대 창작자건 상업영화에 지루해진 관객이건 환영할 사례다.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이들은 평소 본인의 취향과 기호에 따라 각각의 세그먼트에 관한 감상이 달라질 테다. 노덕 셰프가 한국 사회 과도한 불안정노동 병폐를 진단하는 방식은 헤밍웨이가 원작을 쓰던 시절, 대공황으로 이어진 극단적 자본 집중과 맞닿아 있다. 이미지 실험에 기울어진 다른 3편과 이질감이 있지만, 원작 주제와 배경을 풀어낸 충실한 로컬라이징이다.

김종관 셰프 솜씨는 스타일과 색채감에 경도돼 있다. 감독의 탐미주의 지향과 연결하면 근사한 소품이지만, 아무래도 다른 세그먼트에 비하면 이야기 두께가 조금 얇다. 장항준 셰프는 방송에서 유쾌한 만담가로 굳어질 위기를 본인이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라는 과시로 파훼한다. 염상구를 찾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긴장감과 밀도는 실내극 강점을 극대화하며 관객 시선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아마 가장 불친절하고 4편 배열 순서에서 논쟁을 일으킬 게 대단원을 장식하는 이명세 셰프 작업일 테다. 역설적으로 가장 오래 소환될 작업이라 단언한다. 영화 역사 연대기적 상식을 갖춘 이들이라면 <무성영화> 속에 녹아든 고전 명작의 숨결과 인장을 분류하고 추출하느라 오랫동안 현미경 들여다보듯 관찰해야 할 테니 말이다. 이야기 속 외부를 엿보는 틈새는 그 자체로 '시네마토그래프'를 형성하며 영화의 역사를 회고하게 해준다. 거기에 3번째 세그먼트에서부터 연속된 1979년 10.26부터 지금까지 현대 한국사를 소환하는 건 덤이다.

덧 : 실은 <더 킬러스>엔 2편이 더 있다. 윤유경 감독 <언 땅에 사과나무 심기>와 조성환 감독 <인져리 타임>이다. 심은경 배우는 여기 지분도 놓치지 않는다. 언젠가 별도 공개로 선보이길 기대할 따름이다. 그때까진 개봉과 동시에 나온 각본집으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더 킬러스" 포스터 영화 <더 킬러스> 포스터 이미지
"더 킬러스" 포스터영화 <더 킬러스> 포스터 이미지㈜스튜디오빌

[작품정보]

더 킬러스 The Killers
2024 한국 시네마 앤솔로지
2024.10.23. 개봉 119분 청소년관람불가
감독 김종관, 노덕, 장항준, 이명세
출연 심은경, 연우진, 홍사빈, 지우, 이반석, 오연아, 장현성, 곽민규,
이재균, 고창석, 김금순 외
제공 ㈜스튜디오빌
제작 ㈜빅인스퀘어, ㈜프로덕션 에므
배급 ㈜루믹스미디어
더킬러스 어니스트헤밍웨이 이명세 심은경 에드워드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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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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