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정동 여성들
해님공부방
구 시장 주변, 신덕촌이라 불렸던 그 동네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야산자락이었던 동네는 1960년대 도화동과 율도 등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의 정착지로 시작했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인근 염전과 갯벌을 메꾸어 주안 5,6공단이 개발됨에 따라 일자리와 저렴한 주거지를 찾아 모여든 이농민이며 노동자들로 북적대며 제 모습을 갖춰갔다.
집을 쪼개고 구조를 바꿔 세입자를 들이는 집도 늘었다. 시장도 생겼다. 아래층을 상가 건물로 지은 시장연립을 중심으로 야채가게며 생선가게, 고깃집, 기름집, 양품점 등 온갖 가게들이 들어섰다. 야채며 곡식을 파는 상회며 방앗간, 그리고 약국이 두 개씩 들어섰고, 정육점은 한 때 세 개나 있었다. 내가 간 이듬해던가, 불이 나 문을 닫았지만 솜틀집까지 있었다.
사람들의 출신지도 다양했다. 인천 토박이들이 많았을 텐데, 모임으로는 오히려 고향을 떠나온 충청도 향우회, 호남 향우회가 이름을 날렸고, 부모가 황해도 등지의 월남민 출신인 가족들도 더러 있었다.
그 시절 그 다양함 속에서도 해님놀이방 또는 해님공부방에 아이를 보냈던 해님방 여성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은 너나없이 참 부지런했다. 요즘 말로 '독박 육아'는 물론이요, 청소며 빨래, 요리, 설거지까지 집안일을 도맡았고, 대부분 돈 버는 일도 했다. 보육시설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고 아이를 보육시설이나 학원에 보낼 형편도 안 되어서 아이를 돌보느라 부업이라고 불렀던 가내수공업을 집에서 했다.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저임금에 하루 열 두 시간, 열여섯 시간을 일하며 잔업과 철야를 일삼던 당시 노동환경의 영향이 크겠지만, 덩달아 부업시간도 길었다. 아침에 아이 학교 보내고 시작해서 남편이 돌아오는 밤 아홉 시, 열 시까지 짬짬이 집안일 하는 시간을 빼고는 내내 부업을 한다는 여성도 많았다. 리본 만들기, 볼펜 조립, 인형 눈 붙이기, 구슬 꿰기, 실밥 따기 등 하청에 하청을 거쳐서 개당 1~5원짜리가 된 일거리는 종일을 해도 한 달 수입으로 고작 아이들 간식거리 살 돈 정도 손에 쥐게 될 뿐이었다.
집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동네 안의 자그마한 하청공장에서도 일했다. 그래서 물건 실은 트럭이 오갈 수 있는 동네 아래쪽 큰 길가에 작게는 예 닐곱 평, 넓게는 십 여 평 공간을 차지하고 봉제며, 도금할 수저 조립이며, 부품조립을 하는 공장들이 제법 여러 개 있었다. 그러다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되거나 혼자 또는 자기들끼리 둬도 되겠다 싶은 초등 고학년, 또는 중학생이 되면 공장이나 식당일, 노동일 등 월급을 더 받을 수 있는 일터로 나갔다.
우리 사회의 노동 착취 구조를 깨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