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타이페이 도시남녀의 삶을 전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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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시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에이썸 픽쳐스


1990년대 초 대만, '아시아의 4마리용'으로 불리며 한창 눈부신 경제성장 시절의 번영이 집약된 도시 타이페이를 배경으로 동창인 선남선녀들이 뒤엉킨다. '몰리'는 문화예술 기업을 운영하며 부유한 약혼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몰리 곁에는 오랜 시간 친구이자 비서 '치치'가 있다. 치치의 남자친구 공무원 '샤오밍'도 동창 관계다. 세상은 정신없이 변해가고, 각자 일과 사랑을 함께 소화하기엔 늘 시간이 모자라다.

몰리와 치치의 또 다른 동창 '버디'는 예술가다. 그의 극단은 새 희극을 준비하고 있지만, 소설 도용 논란에 휩싸인다. 몰리의 회사가 공연 기획에 결합하기에, 어떻게든 공연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파견한 직원들과 대면조차 거부하는 중이다.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몰리의 부자 약혼자 '아킴'은 화려한 문화산업 판에 종사하는 약혼녀가 혹시나 바람이라도 피우지 않을지 의심한다. 그는 자신의 조언자 역할인 '래리'와 이것저것 어설픈 작전을 펼친다.

판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회사 운영도 난관에 봉착하자 몰리는 마음이 급해진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터라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 배우 지망생인 비서 '샤오펑'이 작가와 협상에 실패하자 짜증이 난 그는 급작스레 해고 통보를 날린다. 치치는 상황을 수습하려 하지만, 제멋대로인 몰리는 요지부동이다. 사장 기분도 풀어주랴 자신이 직접 작가를 면담해 해결하랴 치치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다 보니 고지식한 남자친구 샤오밍과 다투기 시작한다. 친구이자 고용주인 몰리와도 골이 깊어진다.

몰리는 몰리대로 벼랑에 몰린 기분이다. 약혼자 아킴은 원래 몰리 언니의 정혼자였지만, 언니는 집안 기대를 저버리고 학창시절 친구인 소설가와 연애결혼했다. 그 소설가가 바로 몰리와 치치가 판권 문제를 풀어야 할 원작자다. 몰리의 언니는 인기 있는 토크쇼 진행자, 남편은 유명 작가라 사회적 명사 부부로 명성이 높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과거와 달리 지금 이들 부부는 별거 중이다. 명성과 유명세 때문에 '쇼윈도 부부'로 지낸 지 오래다.

치치는 샤오밍과 불화를 겪으며 화려한 외모와 웃음을 잃지 않는 미소 탓에 겪는 세간의 오해로 지친 상태다. 샤오밍은 공직에 있었지만 원리원칙에 충실한 자신과 달리 부정과 독직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만 부친은 아들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런 가운데 샤오밍 역시 원칙과 융통성 사이 혼란에 처한다. 그렇게 타이페이 도시 내에서 서로 운명의 실처럼 그들의 삶은 포개져 간다.

'에드워드 양'이라는 이름이 갖는 함의와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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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시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에이썸 픽쳐스


'에드워드 양'(양덕창)은 대만 예술영화를 대표하는 이름 중 하나다. 흔히 대만 '뉴웨이브' 3대 거장을 손꼽을 때 그와 함께 <비정성시>의 허우 샤오시엔, <애정만세>의 차이밍량을 거론하곤 한다. 대만영화 암흑기이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 이름들이 없었다면, 세계 영화계에서 대만영화는 잊힌 이름이 되었을지 모른다. 따로 또 같이 이 3명의 감독은 독자적인 작가 세계로 전 세계 예술영화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다. 이는 국내도 의외가 아니다. 서구 거장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지명도와 함께 예술영화극장이나 영화제에서 끊임없이 열리는 회고전 행사는 꾸준한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그런 '3대 거장' 중 에드워드 양은 특이한 존재다. 중화권 감독인데도 다른 2명과 달리 오직 그만 영문 이름으로 호명된다. 동남아시아 화교 출신인 차이밍량이나 본인 스스로 에드워드 양과 자신을 '서울쥐와 시골쥐'의 차이라 언급한 허우 샤오시엔의 출발점이 에드워드 양의 작품세계를 결정적으로 차별화한다. 그는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해 영화공부를 했고, 중도 포기한 뒤 캘리포니아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전업해 기술자로 일했지만 결국 영화의 꿈을 놓지 못한다. 출발 자체가 상당히 늦은 편이다.

영화 자체가 서구의 기술적 산물이다 보니 일단 3세계 '시네마 키즈'라면 정지영 감독의 1994년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일단 추종하고 베끼면서 시작해야 한다. 따라 할 모델이 부재한 국내 영화보다 '할리우드'가 더 익숙하고 가깝다. 에드워드 양도 대만/중화권 영화 전통보다 오히려 동시대 서구 영화에 더 친근한 출발을 경험한 셈이다. 그런 감독의 영화는 현대 대만의 어떤 특정한 단면을 포착하고, 세계와 연결되는 찰나를 추적한다. 에드워드 양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만의 변화상이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다.

그의 영화는 대만 뉴웨이브 중에도 '시티팝' 감성이 짙은 동시에 미국 독립영화 전통, 서구 모더니즘 사조와 결합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도출된다. 에드워드 양은 대표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등으로 한국 '시네필의 시대' 초기부터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던 감독이지만 근래 들어 재조명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감독의 영화가 처음 소개될 때 아직 영화를 볼 나이가 아니던 21세기 젊은 영화인들은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인 감독의 30, 40년 지난 작품들에 열광하며 예찬을 숨기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부모세대의 시간대를 대리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주목받았던 독립영화 대표작들, <벌새>나 <남매의 여름밤> 같은 작업은 공통되게 '노스텔지아' 회고적 정서와 과거 시대상을 접목하는 배경을 지닌다.

이들은 자신이 겪지 못한 시공간을 재구성하는데 한국 고전보다 오히려 일본이나 대만의 작가주의 감독들이 보여준 해당 시간대 작품들을 참조한다. 한/중(대만과 홍콩 포함)일 동아시아 인접국들은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상호연결된 역사성과 함께 경제성장과 서구화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그래서 진입장벽도 낮고, 동시대 세계영화 흐름과 조응하는 세련된 일본이나 대만 뉴웨이브 작가들에게 더 호감이 가고 영향받은 셈이다.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렌즈와 필터로 삼아 21세기 한국 청년영화인들은 20세기 후반을 조망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시간을 초월한 감독과 그의 작품이 유지하는 인기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에드워드 양의 작품세계를 확장 체험하게 해주는 이색적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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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시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에이썸 픽쳐스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꾸준히 여러 경로로 국내에 재상영되는 것은 물론, 예술영화 재개봉 붐을 타고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관객을 홀리거나, 혹은 알고 봤더니 이번이 첫 개봉인 상황을 맞이하며 새롭게 흐름을 타고 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감독의 영화를 애호하는 이들에겐 '숨은 보석' 같던 <독립시대>도 극장에 걸릴 예정이다.

<독립시대>는 아마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하나 그리고 둘>로 감독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이질감이 들 법하다. 대개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도시적 감성과 함께 곁에서 지켜보듯 사색하고 관조하는 카메라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음악 및 풍경으로 각인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언뜻 정신없이 속사포처럼 대사가 쏟아지고 다양한 인물들이 부대끼는 군상 극이다. 감독의 작업 중 확실히 예외에 속한다. 그가 영향받은 사조 중 다른 작업에선 드러나지 않던 미국 독립영화 전통이 진하다. 우디 앨런이나 로버트 알트먼 작품에서 느껴지던, 그저 소소한 일상 속 에피소드가 끝없이 이어질 뿐인데 나중에 보니 거대한 풍경화가 그려진 것 같은 스타일이다.

영화 초반은 그저 눈에 불 켜고 쏟아지듯 튀어나오는 인물과 상황 파악에 정신없다. 대체 저 사람은 누구고 저 사람과 무슨 관계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요즘 같으면 OTT 드라마 '정주행' 전에 등장인물 관계도 펼쳐놓고 예습하는 걸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그렇게 방황하다 서서히 머릿속 하나의 '지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비로소 본궤도에 오른 셈이다.

이제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갈리고 엮일지 두근두근 지켜보면 된다. 인물들의 속사정은 마치 우리들의 IMF 직전 '좋았던 옛 시절'과 고스란히 겹쳐 보인다. '신인류의 사랑'이나 '아주 오래된 연인들' 같은 질감이 반갑게 재현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지점 때문에 아마 에드워드 양이 유독 국내에서 더 사랑받을 테다.

경제적으론 과거 세대보다 풍족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고민과 사정은 만만찮게 존재한다. 몰리와 아킴으로 대표되는 신흥 부유층의 정서적 공허와 함께 독립적 삶을 향한 갈망, 부모세대의 전통적 관계와 차별화된 인생을 설계하고 싶지만 오랜 인연에 속박된 청년세대 풍경, 경제적 번영으로 시대의 총아가 된 문화예술의 모순과 미디어 활황, 변화와 기회의 시절이지만 원하지 않게 물려받은 대륙과의 체제경쟁과 그와 무색하게 활성화된 경제적 결합의 지정학이 화면 가득 흐른다.

그런 변화무쌍함 속에서 청년세대의 갈등과 모색은 여러 상징으로 구현된다. 단막극처럼 영화는 종종 암전과 함께 공자의 경전을 인용하며 교훈 극적인 태도를 갖춘다. 에드워드 양 작품에선 이채로운 구석이다. 하지만 넓게는 감독의 영화적 정수를 이탈하지 않는 색다른 '변주'로 이해하면 될 테다. 대륙의 사정과 대만이 처한 숙명은 자유분방해 보이는 주인공들에게도 의외가 없다. 지나가듯 툭 던지는 자조,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 대륙통일 구호와 함께 황금만능주의로 이미 대만과 통합된 본토 체험담은 스타일로만 머물지 않는 에드워드 양의 우주를 가감 없이 구현한다.

인물들이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과 고민은 동시대 그리고 지금 현재 한국 청년세대에게도 여전히 통용될 지점이다. 아마 국내에서 그의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독립시대>를 극장에서 보는 건 그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테다. 현대 동아시아 영화의 원형을 목격할 시간이다.

<작품정보>

독립시대
獨立時代
A Confucian Confusion
1994 대만 드라마/코미디/로맨스
2024.09.25. 개봉 129분 15세 관람가
감독 에드워드 양
출연 진상기, 금연령 외
수입 ㈜에이썸 픽쳐스
배급 ㈜디스테이션, ㈜에이썸 픽쳐스

1994 47회 칸영화제 경쟁
독립시대 에드워드양 진상기 금연령 대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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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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