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볼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승욱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영화 <리볼버>의 기획 의도를 밝혔다. 바로 배우 전도연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도연이 맡은 <리볼버>의 주인공 하수영은 모든 것을 뺏긴 기구한 여자다. 그러나 그것이 전도연에게 새로운 얼굴은 아니다. 빼앗긴 것으로만 따지자면 <밀양>의 신애가 압도적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한 신애의 하나뿐인 아이가 유괴, 살해된다. 신애는 신앙의 힘으로 유괴범을 용서하겠다 결심하지만, 유괴범은 이미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고백한다. 용서할 기회까지 뺏긴 신애에게 남은 건 분노뿐이다.
<리볼버>에서 경찰인 수영은 비리에 연루된다. 경찰 윗선과 재벌이 엮인 마약 사건에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대신 받기로 한 건 남향이라 햇빛이 잘 드는 서울의 신축 아파트 한 채. 그리고 출소 후 경비실장이라는 일자리다. 2년의 세월이 흐르고 출소한 그녀를 찾아온 건 생전 처음 보는 술집 마담 정윤선(임지연)뿐. 이제야 배신당했음을 깨달은 수영은 대가를 약속했던 재벌가의 망나니 앤디(지창욱)를 찾아 나선다.
수영은 칼부림 난동을 겪은 후 일선에서 물러나 타고난 미모와 능력을 활용해 경찰 아나운서로 승승장구 중이었다. 동시에 선배인 임석용(이정재)와 불륜을 저지르며 동료를 배신하고 돈과 권력을 취했다. 영화는 비리 경찰, 불륜녀, 배신자 속성을 두루 갖춘 비호감의 극치 하수영의 모든 면을 좋아할 수 있도록 관객을 설득하려는 야심으로 출발한다. 감독이 선택한 돌파구는 뜻밖에도 전도연의 피로한 얼굴이다.
리볼버의 과녁을 찾아서
수영은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석용에 대한 마음은 이미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여기서 나가면 모든 것을 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감정 섞인 원한이 있는 건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동호(김준환)이나 배신당한 기현(정재영) 정도일까. 금전 관계가 얽힌 이들은 오히려 깔끔하다. 수영에게 주기로 한 돈을 앤디가 카지노에서 돈을 날렸을 뿐. 배신을 당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나 거대한 음모는 없다. 앤디를 만나서도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키라 소리치는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파트를 받는 것뿐이다.
하지만 출소한 수영의 존재 자체가 치워 버리고 싶은 피곤한 짐덩이다. 수영이 받기로 한 신축 아파트의 분양가는 7억 원. 수십, 수백억의 판돈이 우습게 깔리는 영화판 설정에서 교도소에 있는 동안 올라서 15억 원이 된 아파트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꿀 만한 큰돈은 아니다. 그런 애매한 돈에서 어떻게든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려 귀찮은 일을 토스하는 시시한 캐릭터들 사이에서 짐덩이가 된 수영의 존재감과 스스로 느끼는 피로감은 커진다.
이렇게 영화적이지 않은 돈이고, 보잘것없는 마음들이라 오히려 생기는 몰입감이 있다. 오승욱 감독의 전작 <무뢰한>도 그랬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홑이불 깔린 단칸방에서도 개다리소반에 김치 한 종지, 잡채 한 그릇, 소주 한 병을 두고도 진심을 담은 사랑을 저울질하던 명장면처럼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닌 유치한 자존심, 명예나 양심을 내다 팔기에 너무 보잘것없는 푼돈의 유혹에 휘둘리는 <리볼버>의 평범한 주인공들이 언제든 우리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