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 NEW

 
드라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에서는 흉악범, 그리고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는 군사 반란의 주역이다. 단순 악역이 아닌 소위 내로라하는 배우들도 흔쾌히 맡기 어려운 역할을 배우로서 연이어 표현한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특히나 <행복의 나라>에서 그가 맡은 전상두는 우리가 아는 전두환씨를 상징하는 캐릭터다. 이미 수차례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룬 그 인물을 배우 유재명이 새롭게 해석했다.

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재명은 '다행'이라는 표현을 몇 차례 사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10.26 군사 반란의 전말이 아닌 두 개인의 사연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유재명의 전상두가 강조될 경우 이야기의 균형감이 깨질 우려가 있었다. 그가 한 차례 역할을 거절한 이유기도 하다.

"전두환, 악당이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인물"

계엄령 정국에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항소도 하지 못한 채 내란죄(대통령 암살) 명목으로 16일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된 박태주 대령(이선균). 그리고 그를 변호한 정인후 변호사(조정석). 이 두 캐릭터 사이에서 전상두는 자칫 기능적으로 소모될 여지가 있어 보였다. 출연 제안을 한 차례 거절했던 유재명은 "돌아서니 자꾸만 잔상이 남았다"라는 이유로 영화에 합류했다.

"전상두라는 인물이 10.26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고, 어떤 작전을 펼쳤는지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다. 솔직히 두세 장면 더 있었으면 싶었다. 제게 주어진 분량은 순간순간을 끊어서 보여드리는 게 전부였거든. 만약 이 작품이 밀실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모색하는 검은 권력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저도 상상력을 발휘해서 전상두를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전상두는 다분히 상징성이 강한 인물이었고, 뒷짐 지고 돌아서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제 연기를 보는 게 조마조마했다. 골프장 장면이 나오기 전까진 박태주와 정인후를 따라가는 인물이었거든. 결과물을 보니 솔직한 말로 다행이다 싶었다. 내 순간 이기심으로 이야기의 균형감을 깨뜨리지나 않을까 싶었거든. 기발한 상상력, 시대를 넘나드는 영화도 좋지만 이렇게 개인에게 켜켜이 쌓은 고뇌를 통해 시대를 보여주는 것 또한 영화의 본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영화를 위해 머리도 밀었다지만,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유재명이 쌓아온 악역의 계보였다. <노 웨이 아웃>의 김국호,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이창준 검사가 있다. 여기에 전상두를 더해보면 분명 유재명만이 쌓아온 악역 캐릭터들의 개성이 엿보인다. 유재명은 무자비함과 예의 없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10.26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상두를 연기한 배우 유재명.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10.26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상두를 연기한 배우 유재명. ⓒ NEW

 
"제가 스무살 때 연기를 시작해서 25년 넘게 하고 있다. 삭발이야 원효 대사를 연기할 때 실제 절에 가서 하기도 했고, 악역 캐릭터 또한 수차례 하면서 내 안에 어떤 연기적 유전자가 있음을 알게 됐다. 동료 배우들이 좀 싫어하는 표현일 수 있는데 제가 가리는 게 없다. 흉악범을 연기하는 게 뭐가 문제지 하는 생각이거든. 물론 배우 이미지나 차기작 등을 고려하면 고민해야 한다는 말도 맞다. 근데 제겐 태생적으로 그런 고민이 없다. 운명적으로 배우라는 직업을 만나서 하다 보니까 배우로서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을 뿐, 특정 캐릭터 때문에 차기작이 안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하진 않는다.

전상두는 서사가 잘 안 보여서 고민했을 뿐이지, 전두환이라서 고민한 게 아니었다. 김국호가 본성적으로 악인이라면 전상두는 좀 다른 게 엘리트였잖나.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장군이 됐고, 자신의 힘으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박정희나 노태우도 그렇고, 이런 사람들을 단순히 악인이라고 표현할 순 없을 것 같다. 한국 현대사에서 엄청난 위치를 차지하잖나. 어떤 평론가는 흑화된 영웅이라는 글을 쓰시기도 했는데 영화를 보신 분들이 좀 다른 표현들을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배우 조정석, 그리고 이선균을 기억하다

정중동이었던 전상두가 유일하게 단 한 번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 후반부, 정인후 변호사가 절망감을 안고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 전상두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제발 박태주 대령을 살려달라는 애원을 전상두는 가볍게 무시하며 최고의 조롱과 굴욕을 안긴다. 약 10분 분량의 해당 장면을 위해 배우들은 3일간 반복해서 연기했다고 한다.

"사실 면전에 대고 욕하는 정인후를 그냥 총으로 죽일 수도 있었겠지. 그렇다면 정말 단순한 악인이 된다. 하지만 전상두는 끝까지 듣는다. 그리고 '나 정도면 (왕이 될) 자격 있는 거 아냐?'라고 반문한다. 그 오만함, 그래서 영화를 본 어떤 분들은 더 악마 같다고 하시더라. 박정희처럼 전두환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정당화시킨 게 아니었을까. 지독한 권력욕을 그 장면에서 표현하는 게 목표였다.

정인후와 처음 대면하는 장면도 중요했다. 실수로 뒤집힌 명찰을 찬 그를 보고 전상두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아주 고급스러운 조롱을 던진다. '변호사라는 양반이 그러나?'라고. 이 단순한 말로 그를 인간 대접하지 않는 모습,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실제로 마음만 먹으면 정인후를 몇 번이든 죽일 수 있었는데 고문만 하고 살려두잖나. '한번 놀아봐. 난 위에서 널 조종할테니'. 그 비릿한 조소, 씩 웃고 마는 모습을 통해 그 시대의 검은 권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유재명은 동료인 조정석과 이선균에 대해 말을 보탰다. 최근 <파일럿>에서 특유의 코미디 연기로 흥행의 주역이 된 조정석을 두고 유재명은 "엄청난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라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배우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이선균은 큰 고목나무 같은 배우라고 표현했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 NEW

 
"이선균은 진짜 이번에 어려운 연기를 했다. 표현하지 않는 게 가장 강력한 표현임을 잘 드러냈다. 자기 신념과 가족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한 인간의 모습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많은 분들이 그를 두고 많은 말을 해주고 계시다.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 하신다. 어떤 라디오 프로에서 '영화는 그리우면 찾아볼 수 있지만, 사람은 그리우면 찾아볼 수 없다'는 멘트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론 틀렸다고 생각한다. 배우 이선균은 영화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여러 사회적 담론이 있지만 그런 건 조심해서 표현됐으면 좋겠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 그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작업을 했는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그가 그리우면 보면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정말 좋은 배우였구나'가 아니라 정말 좋은 배우다."

끝내 닿지 못한 행복의 나라

역사적 사실이 그러했듯 영화 속 인물들은 끝내 자신들이 원했던 행복한 나라로 가지 못했다. 유재명은 "역사 속 인물과 현실을 사는 개인 사이의 간극이 크기에 이 영화가 다루는 내용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개인이 행복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스템이 있어야 하지 않냐라는 게 우리 영화의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10.26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상두를 연기한 배우 유재명.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10.26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상두를 연기한 배우 유재명. ⓒ NEW

 
"박태주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아내가 밥하고, 애들이 집안을 뛰어다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였잖나. 크고 거창한 게 행복이 아니라 그게 행복의 기원일 것이다. 영화를 보시고 현실로 돌아갔을 때 그 감정을 가져가신다면 작업한 배우로서 보람이 클 것 같다. 12.12, 10.26을 다룬 여러 영화들이 있었다. 이 영화를 두고 마치 <남산의 부장>과 <서울의 봄>을 잇는 연작 시리즈처럼 생각하시는데 개인적으론 그 시대를 조망하는 영화가 풍부하게 나온 게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서로 다른 스타일로 같은 시대를 조명한 영화가 나온 경우가 많지 않으니 말이다.

영화에선 편집됐지만, 전상두가 박태주에게 가족 사건을 던져주면서 했던 말이 있다. '네가 내 밑에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는 대사다. 관객 입장에선 분노할 말이지.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말이거든. 야만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현재에도 앞으로도 어떤 권력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이다. 대체 왜 그런 이들이 나오는지는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들께서 정의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다만 우린 그 사소한 예의 없음이, 그 조그만 배려 없음이 얼마나 인간을 짓누르는지를 알고 함께 분노해야 한다."

인터뷰 말미 그는 영화에서 하숙집 딸로 분한 배우 진기주, 박태주 대령의 아내를 연기한 강말금 배우를 비롯해 변호인단 역할을 수행한 여러 배우들 이름을 언급했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 현장을 경험한 게 큰 기쁨이었다"며 그는 용기를 내서 이 영화를 개봉시킨 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행복의나라 유재명 이선균 조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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