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이미지
엠엔엠인터내셔널㈜
젤소미나 가족이 끝내 참가한 프로그램 경연은 복수의 욕망이 충돌하는 난장판이다. 젤소미나는 아빠와 대립하며 (아마 그로선 첫 번째 반항일 테다) 당장 농장이 처한 위기를 벗어나 숨돌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웃들은 사생결단의 태도로 달려든다. 우승하면 뭘 할 거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이웃 아저씨는 "관광업에 뛰어들기 위해 호텔을 지을 것"이라고 말한다.
프로그램의 '그림'을 위해 좀 더 순수하고 소박한 소감을 기대하던 관계자들이 당혹스러워 한다. 젤소미나의 아빠가 버벅거리며 순수하게 답하는 모습도 이들이 바라던 모습은 아니다. 젤소미나와 마틴이 상황을 수습하며 진심을 전하기 위해 즉석에서 벌인 공연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오지만, 관계자들은 좀 더 자극적이고 눈에 확 들어오는 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젤소미나의 가족은 끝내 도태될 운명으로 보인다.
그렇게 수천 년 이어진 토스카나 시골 마을의 전통적인 삶은 시한부 판정이 내려진다. 이는 이미 영화 내내 예감된 운명이다. 마을 장터에서 고단한 노동으로 완성된 젤소미나 농장의 전통 꿀은 품질을 인정받지만, 결국 시장이 판단하는 최우선 가치는 가격이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시기가 정확히 언급되지 않지만, 유로화가 통용되는 것으로 보아 21세기 초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꿀의 가격을 묻는 손님에게 젤소미나는 5유로라고 답한다. 2023년 현재 유럽 마트에서 최저가 꿀은 3~4유로다. 물론 중국과 튀르키예에서 수입된, 첨가물로 양을 불리고 가격을 낮춘 상품이다. 젤소미나의 가족처럼 전통 방식으로 생산하려면 원가가 7~8유로는 되지 않을까. 현재 서유럽 대부분의 양봉 농가가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가격경쟁력이 가능하지 않으니 양봉 농가가 폐업하고, 국내 생산 자급률이 떨어지고 수입품이 대체하는 것이다. 품질 관리나 생산과정 검수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영화가 공개된 10년 전부터 이미 사회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감독은 고향인 토스카나의 농촌 공동체가 처한 위기, 북유럽 출신 부친과의 추억 등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실제 청소년 배우들까지 양봉 실습을 오랜 시간 해 사실적인 연기를 펼치게 했다. 덕분에 다큐멘터리 묘사처럼 세부적인 묘사가 구현된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드라마의 전형적인 전개라기보다 툭툭 단절되긴 해도 화면 바깥의 실제 삶을 그대로 떠온 느낌이다.
이런 영화적 연출은 <자전거 도둑>과 <움베르토 디>, <흔들리는 대지>로 잘 알려진 비토리오 데 시카 같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네오리얼리즘' 경향의 작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계승적 태도다. 기승전결이 딱 맞아떨어져 '시나리오'라기 보다 툭 지나가다 엿보는 어느 가족의 일상으로 보인다. 화면만 흑백으로 바꾼다면 이 영화의 정확한 시기 구분은 무척 힘들어질 테다. 이는 알리체 로브바케르 감독의 극영화 전반에서 관측되는 특이점이다.
그렇게 젤소미나 가족은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공통된 특징처럼 거역할 수 없는 권력과 원하지 않는 변화의 광풍 앞에서 패배자의 운명으로 치닫는다. 몰락한 자리엔 주인이 떠나고 삭막하고 획일화된 회색빛 덩어리들만 남을 테다. 떠나야 할 운명의 주인공들에게 보장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애지중지 가꿔온 것들은 후려치기된 화폐 가치로 염가에 처분되고, 오랜 시간 동안 추억과 노동이 깃든 공간은 사람이 떠나면 머지않아 폐허로 사라질 테다. 이 동네의 유래가 된 고대 에트루리아 문명이 풍화되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온갖 충돌과 갈등을 영화 내내 자아내던 젤소미나네 가족은 그들의 조상들이 온갖 세파에 시달리면서 서로 의지해 살아남은 것처럼, 견고한 그들만의 공동체를 사수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에서 어둠 속 손전등 희미한 빛 하나로 집 안에서 각자 자리에 흩어져 단잠을 자던 가족은 어느 순간 마당 풀밭에서 함께 매트리스에 의지해 마치 동굴 속 들짐승 가족처럼 한군데 포개어 잔다. 이후 감독의 후속작들 <행복한 라짜로>와 <키메라>에서 즐겨 사용되는 마술적 리얼리즘 효과가 두드러지진 않지만, 사실주의 풍경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상징 표현의 실증 격인 장면들이다. 영화가 마무리될 때쯤이면, 그런 무의미해 보이는 뜬금없던 장면이 비로소 관객의 머릿속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감독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테다. 거기에 더해 후반부에 소년과 소녀가 함께 보내는 밤의 풍경은 마치 고대 신화 속 민족과 국가의 기원 설화처럼 초현실적 신비로움으로 등장한다. 무심코 보고 있자면 마치 신화 속 설정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시치미 뚝 떼고 그려낼 수 있다니.
젤소미나 가족의 초상을 통해 근대적인 국가주의나 자본주의 시장에 포섭된 소비자 집단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오랜 향토의식과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원초적인 공동체의 초상이 구현된다. 툭 지나가듯 파편적으로 보이던 영화의 장면들은 마침내 하나로 통합돼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거대한 역사 풍속화로 완결된다. 그렇게 알리체 로르바케르라는 미래의 거장이 탄생했다는 걸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