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고>로 유명한 낙랑공주(樂浪公主)와 <서동요>의 선화공주(善花公主)는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로맨스 설화의 주인공들이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도 불리는 두 공주의 공통점은 적국의 왕자(호동, 서동)를 사랑했다는 점, 그리고 사랑 때문에 나라의 운명까지 바꾸어놓았다는 점이다.
 
겉보기에 아름답고 가슴 시린 로맨스의 이야기 뒤에 배신, 협박, 조작 등 냉혹한 반전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숨어 있었다. 지난 24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한국사> 118회는 '자명고와 서동요의 주인공, 낙랑공주와 선화공주는 어떻게 나라의 운명을 바꿨나'편을 통해 로맨스 뒤에 숨겨진 실제 역사와 사회상을 조명했다.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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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는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이며 선덕여왕의 여동생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공주는 진평왕의 여러 딸 중에도 어릴 때부터 남다른 미모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수도 서라벌에서 선화공주가 외간 남자와 밤마다 몰래 정을 나눈다는 추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선화공주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이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삼촌인 진지왕이 불륜 스캔들로 폐위되고 왕위를 이어받은 진평왕으로서는 왕실의 추문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선화공주를 귀양보내기로 결정한다.
 
서동요의 기원

쓸쓸히 귀양길에 오르던 선화공주는 우연히 서동이라는 소년을 만난다. 백제 출신의 서동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마를 캐서 꾸리며 살다가 신라 선화공주의 미모가 출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을 느껴 승려로 위장해 국경을 넘어 신라로 왔다. 이름인 서동(薯童)은 '참마를 캐는 아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서동은 사실 선화공주를 궁에서 쫓겨나게 만든 진범이었다. 서동은 아이들에게 마를 준다고 꼬드겨서 공주에 대한 거짓 소문을 유포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서동요(薯童謠)의 기원이다. 노래에 등장하는 '맛둥서방'은 바로 서동 본인을 의미했다. 선화공주와의 만남은 모두 운명을 가장한 서동의 철저한 계획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가짜뉴스로 인한 명예훼손에 스토킹까지 저지른 셈이다.
 
의지할 곳 없었던 선화공주는 서동을 따라 백제로 가기로 결심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공주는 '서동을 따라가면서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동의 교묘한 조작극이 결국 진짜 현실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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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날에는 선화공주 역시 마냥 서동에게 농락당한 순진하고 수동적인 인물만은 아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선화공주는 서동을 따라 백제로 건너간 이후 당시 익산 지역에서 종종 발굴되던 황금을 대거 발견하게 되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선화공주는 서동의 동의를 얻어 도술에 능한 '지명법사'라는 인물을 통하여 하루 만에 신라 왕실에 보냈고, 진평왕은 선화공주와 서동의 혼인을 인정했다고 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 일화를 두고 지명법사라는 인물이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신라에서 파견된 '스파이'였고, 선화공주와 신라 왕실을 연결하는 '연락망'이었을 것이라는 해석했다. 서동도 승려로 위장하고 신라로 넘어온 데서 보듯 승려는 고대 국가체제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몇 안 되는 계층이었다. 운명적인 로맨스처럼 보이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체는 어쩌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첩보전'이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서동이 감춘 충격적인 반전은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서동은 사실 백제의 왕족이었다. 당시 백제는 2년간 혜왕(28대)과 법왕(29대)이 연이어 요절하며 후계자 문제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고, 몰락한 왕족이었던 서동은 백제 귀족세력들에 의하여 일약 국왕으로 추대되기에 이른다. 후대 조선 시대의 철종과도 비슷한 케이스다. 이 서동은 바로 백제의 중흥군주로 불리는 31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의 어린 시절로 추정되고 있다.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에서 일약 적국이던 백제의 왕비가 되는 기묘한 운명을 맞이하게 됐다. 하지만 왕비가 되고 난 후 선화공주의 운명은 평탄하지 못했다고 한다. 무왕은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다는 명분으로 재위 기간 내내 아내의 모국이자 처가인 신라와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선화공주로서는 모국과 남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두 나라의 전쟁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639년, 선화공주는 남편 무왕과 함께 익산 미륵산 인근을 지나다가 우연히 보살을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 이곳에 사찰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고 알려졌다. 무왕이 이를 흔쾌히 수락하여 건설한 사찰이 지금의 미륵사(彌勒寺)다.

뜻밖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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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400여 년이 흐른 2009년 미륵사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미륵사의 창건 배경을 기록한 유물에서,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등장했다. 여기서 왕비는 신라 출신이 아니라 백제 유력 귀족인 사택 가문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역사학계에서 그동안 정설로 알려졌던 선화공주의 일화 자체가 사실이 아니었거나, 혹은 '무왕=서동'설을 반박하는 근거로도 거론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생몰년이 불확실한 선화공주가 무왕의 첫째 부인으로 사찰 중건 도중 사망하면서, 사택 가문의 여성은 둘째 왕비로 맞아들인 것이라고도 분석했다. 선화공주와 '서동요' 일화의 실존 여부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아직도 해석이 분분한 상황이다.
 
두 번째 일화의 주인공 낙랑공주의 출생 연도는 서기 20-30년으로 추정되며,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고대국가 중 하나였던 낙랑국의 왕 최리의 딸로 태어났다. 낙랑공주는 정식 봉호가 아니라 모국의 이름에서 유래한 낙랑국의 공주라는 의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 왕자가 옥저 일대를 유람하다가 우연히 낙랑왕 최리를 만나게 되었다. 호동(好童)이라는 이름 자체가 '인물이 수려하다'는 의미로 그가 상당한 미남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최리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위하여 호동을 자신의 딸 낙랑공주에게 소개해 주면서 두 남녀는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는 서로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혼인까지 맺게 된다.
 
시간이 흘러 호동은 아버지 대무신왕을 보고 오겠다며 고구려로 잠시 귀국한다. 그런데 얼마 후에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편지를 보내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호동의 편지에는 "만일 그대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면 내가 예로서 맞이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라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있었다.
 
자명고각(自鳴鼓角)은 과거 낙랑국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장치로, 이름 그대로 '스스로 울려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북과 뿔나팔'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실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정체에 대해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진동을 이용한 공명장치'에서 '무녀(무속인)들이 적의 침입을 예견하는 예언'까지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 비상경보 시스템'인 셈이다.
 
호동은 낙랑국의 사위로 지내는 동안 아내 낙랑공주를 통하여 국가의 최고기밀이던 자명고각의 존재를 알게 됐다. 사실 고구려는 영토 확장을 위하여 오래전부터 낙랑을 복속시킬 것을 노리고 있었다. 또한 서자였던 호동은 아버지 대무신왕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낙랑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호동의 요구는 자신을 위하여 낙랑공주에게 조국을 배신하지 않는다면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낙랑공주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조국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다. 낙랑공주는 호동의 요구대로 자명고각을 파괴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는 곧바로 낙랑을 급습한다. 낙랑왕 최리는 전세가 기울자 결국 고구려에 항복한다.

하지만 자명고각이 울리지 않은 이유가 바로 자신의 딸 때문이라는 알게 된 최리는 격분하여 낙랑공주를 직접 처형하고 만다. 그렇게 낙랑공주는 배신자의 비극적인 오명을 쓰고 호동과 다시 재회하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했다. 뒤늦게 도착한 호동은 낙랑공주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며 슬픔을 참지 못했다.
 
한편 호동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호동의 의붓어머니)가 "호동이 저를 예로 대하지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는 것"이라고 모함했고, 이를 그대로 믿은 대무신왕이 격노하여 호동을 강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에 충격 받은 호동은 "변명하면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게 되어 대왕께 걱정을 끼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니, 자식 된 도리에서 어찌 이를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자진했다고 한다. 어차피 본국을 돌아가도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벌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강요된 죽음'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어쩌면 사랑을 이용하여 권력을 쟁취한 호동이 스스로의 업보를 되돌려받은 꼴이 됐다.

그런데 오늘날 학계에서는 대무신왕이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진정한 '흑막'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맞이하여 처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 병장기를 파괴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동을 낙랑국으로 보낸 것과 낙랑공주와 혼인을 맺게 한 것, 호동에게 낙랑공주로 하여금 자명고각을 파괴하게 한 것이 모두 대무신왕이 사주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오늘날로 치면 당시 10대 중후반의 청소년에 불과한 호동이 이토록 치밀하고 비정한 음모를 스스로 기획했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더구나 호동은 단지 친아들이기 전에 모계가 동부여계 출신으로 대무신왕에게는 불편한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호동이 자신의 성공을 이용하여 아내 낙랑공주를 이용한 것처럼, 호동 역시 결국 대무신왕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들었던 동화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 들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멀리서 보면 달콤하고 신비로운 로맨스처럼 보였던 이야기도, 가까이서 다가갈수록 '잔혹극'이 되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역사가 곱씹을수록 흥미로운 이유다. 어쩌면 선화공주와 낙랑공주 역시, 사랑이라는 포장 뒤에 가려진 역사의 격변과 정치적 이해관계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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