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들의 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영화는 그저 측은지심이 있다면 누구나 가슴 아프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전쟁 중인 나라의 보육원 쉼터의 풍경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복지사의 시선과 음성해설을 통해 아이들이 처한 비극의 원인과 전망을 관객에게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제공하려는 노력이 영화 내내 집요하게 연속된다.
일단 아이들이 처한 시공간적 제약은 확고한 장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영화 속 쉼터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곳이다. 직원들은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올 법한 보호시설과 차원이 다르다. 비록 열악한 환경과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어렵게 운영되는 티가 팍 드러나지만, 그래도 정서적 안정과 가능한 선에서 물질적 여건을 충족하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과 보통 가정이라면 당연할 테지만 이들에겐 동경의 대상인 '일상성', 즉 생일이나 명절에 받는 작은 선물이나 이벤트 같은 것들을 여력이 되는 한 챙기려 애쓴다. 우리에겐 별 것 아닌 게 그들에게 얼마나 간절한 소망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그저 스치듯 잠시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피난처에 불과하다. 직원도 아이들도 모두 이 움직일 수 없는 전제를 잘 안다. 여기에선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 그저 긴급조치로 찰나의 보호를 수행하기에 때로는 모질게 정을 끊거나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켜야 한다. 그들에게 능동적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유기동물 보호소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들곤 한다. 사실 본연적으로 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잔인한 표현이지만 딱 그랬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절박한 필요를 위해 필사적으로 '절친'을 구하고, '팸'을 형성한다. 한국의 가출청소년들이 하는 그것과 판박이다. 그들의 관점에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지만, 그 결과를 아는 관객이라면 위태로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그들에겐 마치 구원의 동아줄 같은 맹목적 기다림의 대상이 하나 있다. 복도에 설치된 공용 휴대전화 앞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가 자신들을 데리러 오길 기다린다. 그러나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전히 엄마들은 술에 취해 있거나 감감무소식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체념한 채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물 보육원으로 옮기거나, 고작 하루나 이틀의 만남만으로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위탁가정으로 향하게 된다. 9개월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대체 부모란 작자들은 뭘 하나 개탄할 관객이 수두룩할 테다. 아이들의 부모는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아무리 전쟁통이라는 걸 고려한다 해도 무책임이 도를 넘었다. 이런 구조적 악순환의 대물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사회복지사의 목소리는 씁쓸하게 그 원인을 시처럼 풀어낸다.
패턴은 대략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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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위기가정의 취약아동이 쉼터에 입소한다.
②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부모가 친권을 상실한다.
③ 소녀는 자라서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다.
④ 힘든 삶에 지쳐 술에 빠진다.
⑤ 어릴 적 봤던 (본인 엄마의) 삶을 반복한다.
⑥ 자신이 낳은 아이를 보기 위해 과거에 머물던 쉼터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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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외부 조건과 사회적 환경에 따른 악순환 전형이 아닌가.
단순한 동정과 이웃집 불구경을 넘어 세상을 바꾸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