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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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프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독일계로 멕시코로 이민을 온 이후 첫 번째 아내와 사별했고, 이후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해 프리다 칼로를 낳았다. 프리다의 풀네임은 '막달레나 칼데론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인데, 가장 많이 알려진 애칭인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라는 의미다.
프리다는 6살이던 1913년에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생겼다. 이 때문에 프리다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사진을 찍을때 오른쪽 다리를 뒤로 숨기는 습관이 생겼다. 불편한 다리로 주변의 놀림을 받게 되면서 프리다는 한동안 주눅들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이 시절의 프리다는 고통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상상속의 친구'를 만들어 내고 자신이 상상했던 내용을 그림일기에 남겼다. 또 약해진 다른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권투, 레슬링, 축구 등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 이전의 활발한 성격을 되찾았다.
1922년, 15세가 된 프리다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인 멕시코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프리다는 공부도 잘하는 데다 밝은 성격으로 학교생활을 즐기는 '인싸'였다. 자기가 싫어하는 선생님의 수업을 방해하기 위해 교실 창문에 폭죽을 터뜨려서 유리조각을 뒤집어쓰게 하는 위험천만한 장난을 칠만큼 짓궂은 악동의 면모도 있었다.
그런데 1925년 9월 17일, 18세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나락에 빠뜨리게 되는 첫번째 비극이 찾아온다. 프리다 칼로와 남자친구가 타고있던 버스가 탈선한 전차와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버스의 철제기둥이 프리다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고, 지나던 행인이 돕기 위해 섣부르게 기둥을 뽑다 척추와 신경에 더 큰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 사고로 인하여 프리다는 척추, 골반, 쇄골 등의 부위가 모두 골절됐다. 특히 오른쪽 다리는 무려 11조각으로 산산조각나는 중상을 입었다. 더구나 철제기둥이 프리다의 자궁을 관통하면서 그녀는 평생 아이를 가지기 힘든 몸이 되고 만다.
프리다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 부상은 훗날 평생 그녀의 인생을 괴롭히는 족쇄가 된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여러번 재수술을 받아야 했고, 아이를 원했지만 여러번 유산한 것도 이 사고 후유증 때문이었다. 훗날 프리다는 당시를 회상하며 "밤마다 죽음이 내 침대에서 춤을 춘다"며 고통스러웠던 심경을 표현했다.
하지만 의지가 강했던 프리다는 사고 직후 마음을 다잡고 재활에 매진했다. 프리다는 어긋난 척주를 교정하기 위해 특수제작한 코르셋을 착용했고, 사실상 고문이나 다름없는 재활의 고통을 장기간 묵묵히 견뎌냈다.
이 시기에 프리다에게 유일한 한줄기 빛이 되어준 건 그림과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사고 이후 팔만 쓸수 있었던 프리다에게 부모님은 그림을 그려볼 것을 권유했고, 그녀가 누워서도 그림을 그릴수 있도록 특수제작한 이젤을 만들어 줬다.
훗날 프리다는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난 죽지 않았어요. 살아야할 이유가 생겼거든요. 그림이 그 이유에요"라고 고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이었던 교통사고가, 그녀를 위대한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만드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프리다는 1926년 첫 작품인 '벨벳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을 완성한다. 하루종일 누워지내야만 했던 프리다에게 유일한 모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프리다는 재활기간 이후에도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희망의 나무여 굳세어라', '부러진 척추' 등에서는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망가진 자신의 몸을 소재로 삼았다. 그림은 고통스럽고도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리다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기괴하고도 섬뜩한 그림체에 당황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당했던 고통스러운 사연을 알고나면 그를 이해한다.
고된 재활을 이겨내고 20대가 된 프리다는 걸을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프리다가 그림 외에 또다시 빠져들게 된 계기는 사회주의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의 여파로 당시 멕시코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개혁적인 사회주의 열풍이 불었다. 프리다 역시 한때 멕시코 공산당에까지 가입하며 사회주의를 적극 지지한 인물이었다.
프리다는 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훗날 운명적인 인연이 되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만난다. 그는 멕시코 미술계의 거장으로 유럽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유학파였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모교에 벽화를 그려준 인연도 있었다. 두 사람은 공산당 모임에서 처음 만났고, 프리다는 디에고의 예술성과 남자다운 성격에 매료됐다.
디에고 역시 프리다의 미술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않았음에도 "프리다의 캔버스에는 비범한 에너지로 가득찬 표현들, 뚜렷한 개성, 진지한 태도들이 엿보였다. 야심찬 초보들이 흔히 저지르는 무리한 기교가 전혀 없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프리다는 당대의 거장인 디에고의 칭찬에 자신감을 얻었고, 점점 그에게 매료됐다.
21세 차이의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