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넷플릭스
그간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정치극은 상당히 한정적이었다. 수년간 비슷한 선악 구도와 메시지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실화 기반 작품은 대체로 민주화 이전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민주항쟁이나 군부 쿠데타 사건을 소재로 삼아 군부 세력에 저항하는 이들의 숭고함과 희생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서울의 봄>이 그랬고, 그 이전에 <1987> 같은 작품도 다르지 않았다.
허구의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검찰과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악역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정재의 <보좌관>이나 조승우의 <비밀의 숲>이 대표적이다. 반대로 주인공은 <60일, 지정생존자>처럼 재벌, 검찰, 군부 같은 전통적인 기득권층에 저항하고 개혁을 꿈꾸지만 실패하는, 이른바 시민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많았다. 노무현을 비롯한 몇몇 대통령을 연상시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돌풍>은 다르다. 그간 많이 다루지 않은 2000년대 이후의 현대 정치사를 관통한다. 2010년대 중후반까지의 굵직한 정치 이벤트를 쪼개고 비틀어서 대체역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장일준 대통령만 보더라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점, 아들을 비롯한 가족이 검찰 수사를 받은 점, 이후 소속 정당과 검찰 간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을 보면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을 섞은 캐릭터인 게 분명해 보인다.
초인이 되지 못한 낙타와 사자
이 대체역사의 핵심은 초인이다. 진영 구분 없이 초인이 되지 못했고, 초인이 되겠다는 초심을 잊어버린 정치인의 모순과 폐부를 찌른다.
니체는 사람을 낙타, 사람, 어린아이 세 단계로 구분한다. 낙타는 그저 세태를 따르기만 하는 인간이다. 사자는 당대의 권력과 강압에 저항할 줄 아는 인물이다. 사자가 저항의 고통과 허무함을 하나의 놀이처럼 긍정하고 수용하면 어린아이, 곧 초인으로 거듭난다.
이때 초인은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종교, 도덕, 이념의 영역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대신 고통을 자극 삼아 새롭게 삶을 개척한다. 기존의 선악 같은 지배적 가치에 순응하는 대신 자기만의 신념과 목표, 사명을 만들어 실천에 옮긴다. 그러다가 몰락하더라도 그조차 수용하고 사랑할 줄 안다. 즉, 가혹한 삶까지도 마주 볼 수 있는 용기로써 매번 자신을 쇄신하는 사람이 바로 초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돌풍> 속 인물은 대부분 낙타 혹은 사자다. 우파 대표이자 태극기부대의 정신적 지주인 '조상천'(장광)은 낙타다. 납북된 아버지가 전향자로 대우받으며 잘 지내자, 아버지와의 인연을 철저히 부정하고 누구보다 악랄한 공안검사가 됐다. 반공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며 그 시대의 편견에 저항하는 대신 순응했고, 자기 스스로 북한과 관련이 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이를 떨쳐낼 용기도 없다.
반면에 정수진은 사자다. 전대협 소속 대학생으로 학생 운동에 투신했고, 훗날 남편이 된 전대협 회장 '한민호'(이해영)를 지키려고 온갖 고문을 견뎌냈다. '민주주의 만세'라는 문구를 감방 벽에 새길만큼 강인한 의지를 지녔고, 끝내 군부 독재와 공안 검찰 세력을 쓰러뜨린 후 경제부총리까지 됐다. 장일준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정수진의 멘토이고, 정경유착을 뿌리 뽑겠다는 일성을 내세워 대통령까지 당선된 민주 세력의 거두였다.
초인이 되지 못한 이들의 가짜 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