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숙학원>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학생의 안부를 걱정하는 동안 민영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동안 자신을 쥐고 흔들던 이들의 존재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직접적으로 해가 되는 지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왔을, 어쩌면 자신마저 가담하게 만든 모두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가장 먼저는 혜린의 엄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한 혜린이 조금 더 쉬면 좋지 않을까 걱정하는 민영에게 딸의 문제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우리 아이의 문제라며 정확히 선을 긋는다. 공부하다 보면 이런 일은 종종 있으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는 태도다.
기숙학원의 원장 역시 학생의 걱정보다는 선생의 입을 막는 일에 더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고를 확인하기 위한 경찰을 출석 요구를 앞두고는 조금씩 은근해지는 모습이기도 하다. 어차피 이 동네에서 우리 같은 기숙학원이 하나둘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불법인 거 다 알고 시작했을 거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그런 절차나 법이 뭐가 중요하다는 식의 태도. 현명하게 처신하라는 당부 아닌 협박까지 남긴다. 아직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보다는 이미 경계를 넘어선 이들의 마음이 훨씬 더 악독한 법이다.
영화가 이처럼 한 학생의 기절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일들의 면면을 하나씩 짚어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기숙학원이라는 변형된 형태의 미시적인 단계만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 입시라는 시기에 외롭게 매달리도록 만드는 교육 시스템 전체가 어떤 이들의 요구로 완성되어 왔는지 들여다보려는 것. 더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지 않고 관계자들의 구술에만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경찰의 모습 또한 예외는 될 수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두가 어른이라는 점과 그 많은 어른 가운데 누구도 아이들의 진짜 행복과 권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04.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땐 모른 척해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혜린을 걱정하면서도 학원 원장의 사주로 거짓 진술을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던 민영은 쌍둥이 동생 혜수(한누리 분 / 1인 2역)의 요청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 역시 엄마의 욕심으로 학원에 함께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도저히 자신이 없어 혼자 도망쳤다는. 언니인 혜린은 조금 더 쉬어야 하는데 하루라도 더 빨리 퇴원시키려는 엄마를 자신 대신 멈춰달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모든 문제의 면죄부가 되고 홀로 방황하는 민영의 걸음 뒤에서 원장과 부모의 카르텔은 더욱 굳건해진다. 남자친구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그녀의 고민을 두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태 앓고 있었냐고 핀잔을 주며 임용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냥 눈 감고 부모의 편에 서라고 조언한다. 민영에게는 마지막 기댈 자리가 배반되는 순간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응축된 내면의 심리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킬 정도의 강한 동력이 되며 극의 전환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동기가 된다. 이 작품에서는 절반만 따른다. 민영은 혜린의 엄마가 자신에게 맡긴 약통을 반납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지켜봐 달라는 충고를 건넨다. 짓눌려있던 양심을 동력 삼아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이다. 여기까지다. 감독은 그 용기 있는 행동을 긍정적인 결과로까지 이어내고자 하지 않는다. 현실이 그렇지 않아서다. 혜린의 엄마는 다른 학부모들을 부추겨 학원에 컴플레인을 넣기 시작한다. 시건방지고 오지랖이 넓은 강사는 그렇게 퇴출된다. 혜수 또한 다시 한번 기숙학원으로 끌려간다.
▲영화 <기숙학원>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이 작품의 모든 장면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민영의 모습만큼은, 제 몸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입시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모습만큼은 허구로 여겨지지 않는다. 되려 이를 방치하는, 아니 더 몰아치는 어른들의 모습이 현실과 다르기를 바라게 될 뿐이다. 임용고시를 앞둔 민영의 모습을 생각하면 10대 아이들의 삶이 벌써 이렇게 무거울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극영화는 허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다. 이 이야기가 그렇듯 일정 부분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도 있고,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일부 담아내기도 한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까지 완벽히 구조화된 현실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모든 요소가 한 번쯤 언론을 통해 문제로 제기되었던 것들이다. 어쩌면 지금도 아이들은 어딘가에서 꿈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강요 아래에 어른들의 욕심 아래에 깔려있을지 모르겠다.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 마련하는 민영의 행동은 위로나 위안보다는 바람에 가깝다. 과거의 일이라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아무렇게나 방치하거나 덮지 않을 수 있는 용기,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도 다른 누군가를 지켜낼 수 있는 정의, 그리고 어쩌면 주변의 문제를 방관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랑까지도. 우리 모두가 그런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바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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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