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스틸
㈜티캐스트
12일 동안 남자는 10일 출근하고 이틀의 휴일을 겪는다. 4일간 일하고 하루를 쉬었고, 또다시 5일간 일하고 하루를 쉰 다음 다시 출근길에 나서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게 전부다. 물론 작은 고비와 의외의 사건은 일어나지만, 극적인 '클라이맥스'라 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라 봐도 좋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주인공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체감하고 그의 과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참 기이한 영화다.
어떤 이들은 일본 특유의 '치유' 장르 변주라 짐작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당히 일상이 반복되며 소소한 재미를 코믹하게 그려내는 양산형 치유물과는 궤를 달리한다. 오히려 일본 다도 등에서 중시되는 특유의 '와비사비(わびさび, 투박하고 조용한 상태)' 정신을 도쿄 도심 한복판에서 재현한다면 모를까. 검소하고 정적인 표현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특유의 미의식은 일정한 결핍이 배경이 될 때 극대화되는 특징을 지닌다. 그저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소품이나 행위로 봉합하는 게 아니기에 더 수양에 가까운 형태다.
주인공의 일상을 봐도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후배에게 유흥비를 빌려준 다음 귀가 도중에 평소와 다른 장거리 주행 탓에 기름이 떨어지자 당장 현금이 없는 (아마 카드도 없을 듯) 남자는 조금 전엔 단호하게 중고 레코드 가게에 팔기를 거부하던 카세트테이프를 1개 팔아서 겨우 귀가할 수 있다. 100엔 문고판 서적도 싸다고 마구 지르지 않는다. 꼭 읽을 만한 것만 1권씩 구입해 공들여 꼼꼼하게 매일 밤 읽던 책의 남은 분량을 파악해 놓는다.
그가 읽는 책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영문학의 높은 산봉우리 중 하나인 윌리엄 포크너의 장편소설 <야생 종려나무>와 <리플리> 시리즈로 너무나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집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11'>, 그리고 (일본 여류작가) 코다 아야의 에세이 수필집 <나무>다. 전통과 고향에 대한 향수, 평온하게만 보이는 일상 속 미묘한 심리에 대한 예리한 관찰, 그리고 사라져가는 생활 습관과 풍물에 대한 박력 있는 묘사로 정평이 난 이야기들이다. 단골 헌책방과 선술집의 주인장은 그런 남자에게 '지적'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에 주저가 없다.
하지만 책보다 더 남자의 문화적 소양과 기호가 진하게 묻어나는 건 출퇴근길에 그가 재생하는 음악 리스트다. 남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배 세대 중 팝 음악 좀 즐겨 들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귀에 낯익은 명곡들이 줄줄이 등장하기에 관객은 어느새 남자의 하루가 돌아오면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기대하게 될 정도로 선곡이 탁월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애니멀스의 명곡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다른 형태로 중반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오티스 레딩과 (직장 후배의 여자친구가 처음 듣고 감상에 푹 빠지고 마는) 패티 스미스가 뒤를 잇는다.
이걸로 끝날 리 없다. 롤링 스톤즈와 더 킹크스, 밴 모리슨, 니나 사이먼의 명곡들이 마치 중년 남자가 관객을 위한 DJ로 플레이 리스트를 꾸며놓듯 순차적으로 흘러나온다.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면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절로 손이 갈 법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목에 반영된 루 리드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곡들이 압권이다. <접속> 삽입곡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Pale Blue Eyes>와 <Perfect Day>가 귓가에 아련히 맺힌다. 그 음조를 듣는 남자의 표정은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기를 거부하는 투쟁처럼 묵직하고 다채롭다. ost와 장면의 조화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반드시 음향이 잘 된 극장에서 관람해야 할 영화다.
획기적 공공건축 프로젝트에 예술성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