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우렌의 결혼> 스틸 이미지
㈜트리플픽쳐스
가짜 결혼식이 추진되면서 신랑과 신부로 합을 맞춰야만 하는 '다우렌'과 '아디나'는 상반된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감의 가능성을 잔뜩 가진 존재들이다. '다우렌'으로 변신한 '승주'는 한국독립영화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불안정한 청년세대의 표상으로 설정된다. 그는 자신만의 이야기로 영화를 완성하고 싶지만, 현실은 방송국에 납품하는 외주 영상제작업체에서 낮이고 밤이고 저임금에 시달리며 대표의 희망 고문에 일희일비하는 신세다. 뭔가를 자기 이름 걸고 도전해보고 싶지만, 그에게 기회는 통 주어지지 않는다. 결정권과 재량은 전혀 보장되지 않지만, 문제가 터지면 책임은 오롯이 최말단인 그의 몫이다. 대학 동창을 방송국에서 우연히 만나지만, 과거엔 같은 현장에서 동료 스태프로 일하거나 술자리에서 잔을 나눴을 법한 친구는 이제 자신과 승주의 격차를 은연중에 내세우며 낮춰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업체 대표가 그나마 업계에선 상대적으로 호인으로 묘사되는 덕분에 자막 사고에도 불구하고 승주는 큰 탈 없이 위기를 벗어나지만, 주인공인 그 역시 온전히 긍정적인 캐릭터로 그려지진 않는다. 물론 과도하게 설정된 외주업체 업무 때문에 초래된 사고일지언정, 다큐멘터리 작가를 지향하는 그가 사실관계 확인을 무시한 건 참작은 될지언정 용납될 순 없는 일이다. 방송국 정규직이 된 옛 동창에게 주눅 들지 않으려 허세를 부리거나, (한국인들이 관광지에서 자주 저지르는) 3세계 국가에 대한 몰이해와 무시 같은 스테레오 유형의 한계 역시 고스란히 가졌다. 그래서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하는 측면도 발생한다.
그렇게 한국의 청년세대가 현재 처한 온갖 수난을 한몸에 안은 평범한 주인공에게 등장한 가짜 신부 '아디나'는 시골 마을에서 '홍반장' 역할을 하는 존재다. 유망한 양궁선수였지만 불우한 가정형편 때문에 꿈을 이룰 기회를 포기한 채 병든 엄마를 돌보며 돈을 벌기 위해 오만가지 동네일을 감당하는 만능 캐릭터다. 승주는 아디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강하게 끌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디나는 가난하기에 돈벌이가 절실하지만, 쉽게 승주 일행의 가짜 신부 제안에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묵묵히 감내하며, 그가 도시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숱하게 봐 왔을 한국인들의 편견과 오만에 맞선다. 그러나 환경의 제약은 그가 극복하기 힘든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런 두 사람이지만 성공적으로 결혼식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서로 얼굴 맞대고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둘은 자석의 극처럼 밀어냈다가 다가가길 반복한다. 동병상련의 느낌과 어차피 맡은 일은 소화해야 하기에 친하게 지내려다가도, 승주의 주제넘은 참견에 아디나는 발끈하며 자존심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래도 청춘남녀가 상당한 시간 부대끼다 보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게 마련이다. 둘이 서로를 밀어내는 장면들은 같은 '한민족' DNA를 들먹이지만, 경제적 격차로 내심에선 깔보는 현대 한국사회의 집단적인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반대로 그들이 공감하고 이해하게 되는 장면에선 현재 국경을 초월해 청년세대들이 처한 공통의 난제를 떠올리게 된다. 조금 더 확장하자면 시대를 초월해 청춘들이 고민하고 직면하는 숙제들의 전형이라 하겠다.
이들의 갈등과 쉽게 해소하기 힘든 인식 차이는 근본적으로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1세계 vs. 3세계의 '격차'에서 비롯된다. 승주가 영화 중반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해 내뱉은 '훈수'는 그런 1세계의 (악의는 아니지만) 무지와 편견에 기원한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넓은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정론이지만, 그 세상의 기회는 이제 어느새 스스로 '선진국'이라 행세하는 한국이나 동급의 나라에 국한된다. 20년 전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결혼을 인생역전의 기회로 홍보하던 결혼이벤트업체의 인식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생각이다.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사회의 한계와도 통하는 대목인 셈이다. 그에 대한 아디나의 반론은 심각하게 이어지진 않지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향하는 단선적 발전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선언인 셈이다.
진실에 대한 청년세대의 희구를 그리다
▲영화 <다우렌의 결혼>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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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는 다큐멘터리 작가를 꿈꾼다. 그런 그가 영화 초반에 저지른 치명적 실책은 어쩌면 그의 경력을 끝장낼 수 있었지만, 이 역시 작가로 자신의 이름이 표기되지 않는 바람에 무마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역할이 보장되지 않기에 책임 역시 질 게 없는 것이다. 그렇게 권한이 없기에 책임도 면책되는 청년세대의 현주소는, 기성세대가 요즘 청년들은 책임감이 약하다는 푸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세태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짚어볼 대목이다. 하지만 순간의 오류로 사고를 치긴 했으나 그저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작가'가 되길 꿈꾸던 승주로선 상처로 남은 건 분명하다. 방송국 김 PD나 업체 송 대표의 '다큐멘터리는 진실이 생명이다!'라는 훈장님 말씀보다 작가로서의 근본적 태도를 훼손했다는 게 주인공에겐 몇 곱절 더 큰 충격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름대로는 원리원칙이라며 강조하던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은 어떻게든 납품을 기한 내에 수행해 원청과의 계약을 유지해야 하는 현실 앞에 무기력하다. (호인으로 묘사된) 대표가 위선자라 그런 게 아니라, 그 역시 타협을 거듭하다 보니 무감각해진 데 불과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런 말을 내뱉은 것도 금방 잊고 말았지만, 승주는 그럴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다우렌' 역할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그의 고뇌, 그리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한 뒤에 보이는 면모를 보면 그가 기성세대에 쉽게 흡수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해준다. 코미디의 정서가 두드러지는 <다우렌의 결혼>이지만 주인공이 겪는 '다큐멘터리의 진실성' 고민은 대충 날림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착한 거짓말'에 대한 논쟁과도 쉽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런 주인공이 작가로 데뷔하려는 꿈의 기획은 얼핏 듣자면 뜬금없다. 승주가 자신의 기획안을 설명할 때 이를 듣는 대표와 주변 사람들의 표정 역시 딱 그렇다. '갈치'의 탄생부터 최후까지 여정을 밀착해서 추적하겠다니 말이다. 하지만 갈치라는 어류의 특징을 강조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임하는 승주의 프리젠테이션 현장을 보고 있자면 그의 진심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하필 왜 갈치일까? 마치 현재 청년세대가 거세게 반감을 품고, 자신들의 성장할 기회를 제약하는 '타도대상'으로 설정하는 소위 '86'세대의 문화적 아이콘 중 하나로 소설 <고등어>를 떠올린다면, 다채로운 생각을 관객 개별로 떠올릴 법하다. 고등어와 갈치는 어떻게 대비되는 존재로 기능하는 걸까?
그런 단면들을 고려해보면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의도가 <다우렌의 결혼>을 휘감은 정서와 직통한다는 생각을 않을 수 없다. 작품을 연출한 임찬익 감독은 요즘 독립영화 주요 창작집단인 20-30 청년세대가 아니라 한 세대 앞으로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런 감독이 응시하는 2020년대 영화와 영상제작 판, 그리고 자신과 함께 일하게 된 청년세대 스태프들과의 체험이 세대 담론에 대한 고민을 녹여내게 만들었을 테다. 그런 고민 덕에 후속세대에 대한 연민과 옹호의 정서가 <다우렌의 결혼> 핵심 척추로 기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앞선 세대 경험자 차원의 시선이라는 건 피할 수 없다. 물론 '내가 해봐서 아는데!' 등속의 오만과는 거리가 멀다. 안쓰럽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면 잘 될 거야!' 혹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 정서가 두텁게 느껴진다. 그래서 막상 청년세대가 보기엔 너무 낙관적으로 동떨어진 희망고문이 될 여지도 있겠다.
카자흐스탄의 웅장한 풍광이 강점이자 고민
▲영화 <다우렌의 결혼>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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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혼원정기>에 이어 오랜만에 중앙아시아의 풍광을 가득 담은 한국 제작영화다. 게다가 정신적 전작이라 해도 무방할 <나의 결혼원정기>가 도시 부분이 적지 않다면, <다우렌의 결혼>은 카자흐스탄 최남단에 자리한 사티 마을과 주변의 대자연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더 '안락의자 여행가'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처음 마을에 도착한 승주와 영태가 경탄하며 바라보듯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관객 역시 같은 상념을 품게 될 테다.
하지만 이 부분이 양날의 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을에서 만난 순박하고 선량한 주민들에게 승주와 영태가 친밀함과 애착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선진국/대도시에서 찌들대로 찌든 주인공이 '고귀한 원시' 혹은 변방의 생기를 수혈해 위기에서 회복하거나 성장하는 이야기의 전형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형적인 설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곳곳에서 발견 가능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다우렌'은 이주노동자 문제를 상업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효시라 할 2010년 작품 <방가? 방가!>에서 김인권 배우가 취업하기 위해 부탄인으로 위장했던 설정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주인공 '방가'가 이주노동자가 처한 엄혹한 환경을 체험하며 편견을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그와 '썸'을 타는 베트남 여성 '장미'와 '아디나'의 면모 역시 그렇다. <나의 결혼원정기>나 <방가? 방가!>가 10여 년 훌쩍 지난 작업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다우렌의 결혼>에 담긴 정서 역시 그런 온정적 정서와 그에 기반을 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간파할 수 있겠다.
물론 영화는 마치 사회파 영화들이 대거 등장하기 전 할리우드 영화들이 갖췄던 소박한 인간적 코미디들의 미덕을 잘 구현하고 있다. 고려인 후손들이 보여주는 동포에 대한 환대와 함께 돈 좀 있다고 굽실대거나 비위를 맞추지는 않는 자긍심, 그에 비해 여전히 진한 환대의 정서를 목격하는 건 흐뭇한 경험이다. 그와 함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유배된 처지를 극복하고 현지 사회와 교류하며 구현한 문화적 전통이 풍성한 '먹방'으로 제대로 구현되는 건 시각적으로 큰 장점이 되어준다. 정말 제대로 먹을거리 묘사가 이뤄졌기에 영화를 보고 나면 극중 등장하는 요리들을 찾게 될 테다. 거기에 억지스럽지 않은 캐릭터 설정과 연기 덕분에 굳이 무리수 없이 표현되는 유머 코드가 전개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구현되는 것도 긍정적 요소다.
(정작 본인 연출작에선 암울하기 짝이 없는 풍경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프로듀서이자 허풍 가득한 고려인 감독 '유라'로 출연한 박루슬란 감독이 영화 속과는 달리 제대로 '나와바리' 관리를 해냈음이 여실하게 다가온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사티 마을 역시 현지 스태프 중 이곳 출신이 있어서 원활하게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마을 이장님을 비롯한 현지 주민들과 중앙아시아 영화학과 학생들의 대거 기용과 함께 아시아 내 영화협력의 새로운 도전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요즘 한국독립영화에선 오히려 희귀해진 디킨스 풍의 군더더기 없는 청춘 성장물에다 행간에 숨은 생각거리도 상당한 결실이다.
<작품정보> |
다우렌의 결혼 Dauren's Wedding
2024│한국│드라마
2024.06.12. 개봉│83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임찬익
출연 이주승(승주 역), 아디나 바잔(아디나 역), 구성환(영태 역),
조하석(게오르기 역), 유승목(송대표 역), 박루슬란(유라 역),
김조야(유라 할머니 역)
PD 박루슬란
제공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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