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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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세계 부자 1위는 어떻게 명품제국을 이루었나'편을 통하여 아르노의 일대기와 LVMH의 역사를 조명했다. 고영경 연세대학교 연구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LVMH 그룹이 보유한 수많은 명품 브랜드 중에서도 실질적인 모태로 꼽히며 가장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는 역시 루이비통이다. 창업자인 루이 비통(1821-1892)은 프랑스에서 가난한 목공소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파리에 상경하여 트렁크 공방에서 일하며 재능을 만개하기 시작했다. 루이 비통은 프랑스의 황후였던 외제니 드 몽티조의 눈에 띄어 전담 패커(짐을 싸주는 사람)로 이하게 되었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평평하고 가벼운 사각 트렁크를 최초로 개발해내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854년 루이 비통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포장 회사를 개업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명품 브랜드 루이 비통의 기원이다. 루이 비통은 혁신적인 기술에 더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시그니처 패턴인 다미에와 모노그램, 캔버스 패턴을 개발했고, 이는 아들 조르쥬 비통 등 유능한 후손들을 통하여 착실하게 계승되고 진화한다.
1900년대 루이 비통의 손자인 3대 가스통 비통의 시기에 이르러, 자동차의 확산과 여성의 활발해진 사회 진출을 반영하여 활동적인 핸드백(Handbag)의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이때부터 가방은 단순히 짐을 담는 수단으로서의 용도를 넘어 '고급스러운 패션 아이템'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루이비통은 다양한 수단과 상황에 따른 맞춤형 핸드백을 만들어내며 명품 가방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높여갔다.
1977년 가스통 비통의 사위인 헨리 라카미에가 4대 경영자에 오르면서 루이비통의 매출은 급성장하는데 그 액수만 10억 달러(1987년 기준)을 돌파할 정도였다. 루이비통을 더욱 성장시키고 싶었던 라카미에는, 1987년 주류회사 모엣헤네시와 전격적인 합병을 추진하며 드디어 LVMH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LVMH 출범 당시, 루이비통과 모엣헤네시는 전체 그룹의 절반 이상인 51%의 지분을 차지하며 외부 주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합병직후 LVMH의 초대 회장이 된 것은 회사 규모와 지분이 컸던 모엣헤네시의 CEO 알랭 슈발리에였고, 라카미에는 수석 부사장을 맡았다.
하지만 업종과 성향이 전혀 달랐던 두 기업의 동거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슈발리에와 라카미에는 LVMH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그 빈틈을 파고든 것은 의외로 제 3의 인물였던 베르나르 아르노였다.
아르노는 1949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밑에서 재벌2세 '금수저'로 성장했다. 아르노는 프랑스의 MIT로 불리우던 공학 전문대학인 그랑제콜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하여 경영수업을 거쳐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았다.
아르노의 인생모토는 "1등이 될 수도 없으면 그 길을 가지도 말라"로 유명하다. 사업감각이 뛰어나고 트렌드에 민감했던 아르노는, 건설사업이 호황기가 지났다고 판단되자 아버지가 세운 건설회사를 매각하고 부동산 산업으로 과감하게 업종을 진환하여 큰 성과를 거둔다.
이후 1981년 미국으로 진출한 아르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존 클러지 당시 메트로미디어 회장 등을 만나 미국식 경영법을 배우게 된다. 특히 '차입매수(인수할 기업의 재산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라는 수단을 통하여 아르노는 투자를 통한 기업의 성장과 수익 극대화라는 노하우를 터득하게 된다.
프랑스로 돌아온 아르노는 1984년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 디올(Dior)의 모기업 부삭그룹이 경영위기에 놓이며 파산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밀한 전략 끝에 인수에 성공한다. 아르노는 부삭을 인수한 뒤 불과 2년 만에 1만 1천여명의 직원중 9천여 명을 해고하는가 하면, 명품사업과 관계없는 그룹 내 회사들을 모조리 매각하거나 정리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아르노의 냉혹한 결단으로 인수 3년 만에 흑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1980년대 프랑스는 사회주의 열풍으로 부유층과 기업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높았다. 아르노는 부도난 회사를 살렸다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비정한 행보는 프랑스 사회에서 횡포로 여겨지며 많은 대중들의 맹비난도 동시에 받아야 했다. 지금도 프랑스에서 아르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디올에 이어 아르노의 눈에 들어온 타깃이 바로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던 LVMH였다. 라카미에는 슈발리에가 주류회사 기네스와 손을 잡고 지분을 늘려가자 위기감을 느끼고, 같은 패션업계에 있던 아르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노는 1987년 '블랙먼데이' 사태로 세계 주가가 폭락한 틈을 타서 LVMH의 주식을 사들이며 지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르노는 과연 경영권 전쟁에서 어느 편에 서는 것이 더 유리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루이비통을 버리고 모엣헤네시를 선택하여 라카미에의 뒤통수를 제대로 치게 된다. 아르노는 기네스와 손을 잡고 합작회사를 설립했고 이어 디올의 일부 지분까지 매각한 끝에 단숨에 LVMH의 새로운 대주주로 등극하게 된다.
공격적인 투자를 통하여 아르노가 확보한 지분은 43.5%로 이는 루이비통과 모엣헤네시가 각각 보유했던 지분보다 더 많았다. 동맹군인 모엣헤네시와 기네스는 기존 CEO였던 슈발리에보다도 아르노를 적극 지지했다. 경쟁에서 밀려난 슈발리에는 퇴임했고, 라카미에는 소송을 걸었으나 패소한 뒤 모든 지분을 매각하고 퇴임했다.
1989년 아르노는 40세의 나이에 마침내 LVMH의 수장에 등극한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는 "사람들은 슈발리에가 닭장을 지키려고 늑대를 초대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돈많은 자본가가 모든 것을 손에 넣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고 보도하며 아르노를 향한 당시 대중들의 시선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르노의 대표적인 별명이 된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라는 표현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LVMH는 아르노가 CEO가로 된 이후 명품 브랜드 시장을 싹쓸이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특히 아르노가 주력한 인수 부문은 역시 패션과 주류 브랜드였다. LVMH는 분야를 넓혀 불가리(BVLGARI) 티파니앤코 (Tiffany & Co)등을 잇달아 사들이며 회사의 몸집을 세계 최대 규모로 키워냈다.
2024년 현재 LVMH는 6개 분야에서 75개의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 LVMH의 시가총액은 4천2백억달러(한화 약 570조원)이며 유럽 기업내 시가총액 1,2위를 다투고 있다.
아르노와 스티브 잡스의 대화
이처럼 아르노가 유독 명품 브랜드 인수에 집착하는 이유를 짐작할수 있는 한 일화가 전해진다. 아르노는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와의 대화에서 "과연 30년 후에도 사람들이 아이폰을 쓸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빈정이 상한 잡스가 "잘 모르겠다. 그럼 30년후에도 당신이 파는 명품은 건재할까?"라고 받아치자 아르노는 웃으며 "그건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30년 후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고급 샴페인에 취해 있지 않을까. 우린 상품이 아니라 역사를 팔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유롭게 응수했다고 한다.
실제로 LVMH의 명품 브랜드 대다수는 트렌드를 타지않는 품목에 해당된다. 유행과 기술의 발전에 영향을 받을수밖에없는 전자기기와 달리, 문화와 역사를 파는 명품브랜드는 영원할 것이라는게 아르노의 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