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영화, OUR LAND, OUR FREEDOM의 메인 포스터  8년에 걸쳐 제작된 이 영화는 자유와 토지정의를 위해 싸웠던 '아프리카 체 게바라' 데단 키마디와 딸 완주구 키마디의 지난한 투쟁을 그렸다.
다큐영화, OUR LAND, OUR FREEDOM의 메인 포스터 8년에 걸쳐 제작된 이 영화는 자유와 토지정의를 위해 싸웠던 '아프리카 체 게바라' 데단 키마디와 딸 완주구 키마디의 지난한 투쟁을 그렸다. Meena Nanji, Zippy Kimund
영국은 2차세계대전 당시 유럽을 나치통치에서 구한 좋은 국가라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교과서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로도 꾸준히 재생산되어 왔다. 하지만 히틀러를 패배시킨 지 불과 몇 년 후 영국이 케냐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비인도적인 만행에 대해서는 좀처럼 알려진 바가 없다.

하버드대학의 캐롤라인 엘켄스 아프리카학 교수가 쓴 저서, <영국의 굴라그: 케냐에서의 잔인한 제국주의 종말(Britain's Gulag: The Brutal End of Empire in Kenya)>에 의하면, 영국식민정부는 식민통치기간(1895년~1963년) 케냐인들의 토지와 수확물을 강탈하고 이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으며, 비싼 세금을 내지 않으면 원주민들에게 구타, 고문 등 잔인한 폭력을 가했다. 원주민들의 평화적 교섭요청을 영국이 무시하자 곳곳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특히 토지반환과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이에 저항하던 키쿠유족의 '마우 마우(Mau Mau) 독립운동'은 영국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영국은 150만 명에 가까운 키쿠유족 대부분을 강제수용소에 가두거나 철조망으로 이들의 마을을 봉쇄했는데 이로 인해 1960년까지 수십만 명이 질병과 고문, 기아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된다.

이런 엄청난 범죄사실은 심지어 케냐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1963년 영국으로부터 표면상 독립했지만 식민정부에 부역했던 세력에게 권력이 이양된 데다가, 데단 키마디가 이끌던 '케냐토지&자유군'의 마우 마우 독립운동은 2003년까지 언급조차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프리카의 체게바라'로 여겨지던 데단 키마디는 1957년 교수형을 당하고 시신도 극비에 버려졌다. 하지만 지금 마우 마우 독립운동의 당사자 및 후손들은 역사적 정의를 원하고 있다. 특히 키마티의 딸인 완주구 키마디는 부친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가며 열정적으로 성공적인 토지정의 풀뿌리운동을 해오고 있다. 케냐뿐만 아니라 식민통치를 겪은 바 있는 신생 독립국가들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베테랑 감독, 미나 난지(Meena Nanji) 및 지피 기문두(Zippy Kimundu) 감독은 이런 카리스마 넘치는 완주구와 그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 < OUR LAND, OUR FREEDOM >을 공동연출했다. 이 작품은 영국식민통치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주류 역사책에 존재하지 않는 마우 마우 독립운동을 케냐인들의 관점으로 재조명한다. 8년에 걸친 오랜 노력의 결실로, 2023년 가을 암스테르담국제영화제(idfa)에서 첫선을 보인 후 이번주 영국 셰필드다큐영화제에서 현지 관객을 만난다.

한편, 이 영화는 8월 22일 개막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초청되어 8월 24일과 27일 두번 상영될 예정이다.

지난 5월 열린 독일 뮌헨의 다큐영화제 DOK.Fest에서도 아프리카 특별섹션의 일부로 소개되었다. 이외에도, 동 영화제는 독일의 옛 식민지, 탄자니아에서 독일이 저지른 범죄를 폭로하는 동시에 독일정부와의 화해노력을 그린 < The Empty Grave >, 독일에서 유학 후 귀국해 자국민의 권리옹호를 위해 싸우다 반역죄로 독일 식민정부에 의해 사형 당한 카메룬의 왕(루돌프 두알라 망가 벨)과 독일에 사는 증조카(장피에르 펠릭스에윰)의 조상에 대한 명예회복 노력을 소재로한 < The New Good German >도 소개했다. 이를 연출한 페터 헬너는 수십년 동안 아프리카에 천착한 독일 감독으로 수십편의 다큐를 제작한 바 있다. 참고로, 미나 난지 감독은 소외된 지역사회의 소녀들에게 시민 저널리즘을 교육하는 엔지오, 글로벌걸미디어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하다. 아래는 필자는 지난 금요일(14일) 줌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일문일답을 요약한 것.

"마우 마우 독립운동 부정적으로 묘사... 누가 야만인이었나?"

 미나 난지와 지피 키문두 감독 미나 난지 감독(좌)과 지피 키문두 감독(우)이 매년 봄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독페스트 다큐영화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나 난지와 지피 키문두 감독미나 난지 감독(좌)과 지피 키문두 감독(우)이 매년 봄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독페스트 다큐영화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DOK.Fest
- 이 영화의 소재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얻게 되었나.
미나 난지 : "저는 케냐에서 태어났고 10살쯤에 케냐를 떠났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여전히 매우 생생하다. 2012년경 영국이 운영한 케냐의 강제수용소를 폭로한 <영국의 굴라그: 케냐 제국의 잔인한 종말>이라는 역사책을 읽게 되었다. 어렸을 때도 독립운동에 관심이 있었지만 엘켄스 교수의 이 책을 읽은 후 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피 키문두 : "저는 이 역사에 대해 침묵하던 집안에서 성장했다. 우리 가족 중 마우 마우 운동을 했던 이들도 있었고 반대편에서 영국편에 협력했던 이들도 있었다. 제게 이 영화작업은 제 자신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토지 이슈는 제게도 매우 사적인 문제다. 2002년 케냐에서 처음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저희 집은 방화로 인해 불에 타버렸고 토지는 압류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분할 통치' 전략에 뿌리를 둔 부족간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분열은 오늘날에도 우리 국민을 계속 고통스럽게하고 있다. 저는 이 영화가 국민간 통합과 화해를 촉진하고 국가적 치유를 위한 영감이 되기를 희망한다."

- '마우 마우 독립운동'이 케냐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나 난지 : "영국의 케냐 식민지 시절, 영국정부는 원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았고, 이에 대한 즉각적인 저항이 있었다. 토지의 평화적 반환을 위한 초기 협상은 영국에 의해 무시되었고,1940년대 후반부터 데단 키마디가 이끄는 '케냐 토지&자유군'이라는 독립운동 성격의 무장 저항이 일어났다. 데단 키마디는 정치적 독립과 토지 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장 투쟁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두려워했던 영국정부는 마을을 무차별 폭격하고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이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두는 등 집단 처벌을 가하며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또한 영국은 영화, TV, 라디오부터 학술서적, 인류학, 뉴스 매체를 활용해 마우 마우 독립운동에 참여한 원주민들을 '무분별하게 폭력적이고', '극단적'이며, '문명화가 필요한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프로파간다 전쟁을 벌였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고정관념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야만인이었나 묻고 싶다. 누가 다른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죽이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실행했나.

영국이 땅을 강탈한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고, 이 억압의 역사를 극복하기 어려운 현재의 빈곤한 현실과 연결 짓는 것은 중요하다. 아프리카의 엘리트들은 영국 엘리트층으로부터 같은 경제 구조를 물려받았다. 즉, 땅이 없는 사람들은 땅을 가질 수 없는 그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뒤를 돌아봐야 한다."

- 데단 키마디가 남긴 역사적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나.
미나 난지 : "좌파 성향의 사람들은 그를 정말 영웅으로 여긴다. 그의 이미지가 그려진 티셔츠와 머그잔에서 그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다소 엇갈리는 반응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이끈 독립운동이 36명의 백인 정착민을 살해한 무장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수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영국군에 의해 살해된 맥락이 있다. 현 정부는 마우 마우가 우리의 독립투사라고 공개적으로 말했고, 대통령은 그의 시신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즉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또한, 마우 마우의 독립투쟁은 다른 지역의 반식민지 투쟁에 상상력을 고취했다. 예를 들어 넬슨 만델라는 케냐에서 일어난 일에서 큰 영감을 받았으며, 말콤 엑스와 블랙 팬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데단 키마디는 당시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여겨졌다."

- 2003년에 마우 마우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고, 2007년 수도 나이로비에 키마디 동상이 세워지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미나 난지 : "한마디로, 새 정부가 들어섰다. 이전 정부에서는 영국정부에 충성한 세력이 집권했다. 새 대통령은 가족 중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당시 금지령해제는 엄청난 일이었다. 아울러 키마디 가족은 동상을 세우기 위해 정말 열심히 싸웠다.

또한, 식민지 치하의 삶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70~90살의 고령이 되었다. 그들은 삶에 너무 지쳐서 살해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신들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식민지 시대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생각한 시민들도 있었다. 한편, BLM(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은 큰 영향을 미쳤고 케냐의 대중문화도 변화시켰다. 이는 우리에게도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중심으로 탈식민주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우리 프로젝트도 주목받기 시작했고 영화 투자를 받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전에는 식민주의는 고루한 주제라고 여긴 경향이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과는 배상"

독페스트에 참가중인 지피 키문두 감독 지피 키문두 감독(왼쪽 첫 번째)이 뮌헨 소재 독페스트영화제에서 탈식민화 관련 토론회에 참가해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 The Empty Grave >를 공동연출한 Cece Mlay 감독. 올해로 39회를 맞는 독페스트영화제는 지난 십여 년간 아프리카 지역에 촛점을 맞춘 ‘독 네크워크 아프리카(DOK.network Africa)'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유럽과 아프리카 영화인들간 문화교류에 앞장서왔다.
독페스트에 참가중인 지피 키문두 감독지피 키문두 감독(왼쪽 첫 번째)이 뮌헨 소재 독페스트영화제에서 탈식민화 관련 토론회에 참가해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 The Empty Grave >를 공동연출한 Cece Mlay 감독. 올해로 39회를 맞는 독페스트영화제는 지난 십여 년간 아프리카 지역에 촛점을 맞춘 ‘독 네크워크 아프리카(DOK.network Africa)'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유럽과 아프리카 영화인들간 문화교류에 앞장서왔다. 클레어함
- 마우 마우족의 토지 정착을 위한 풀뿌리 운동을 펼치는 데단 키마디의 딸, 완주구의 노력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미나 난지 : "우연이었다. 완주구는 우리가 고용한 코디네이터이자 통역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겠다고 제안했다. 한번은 그녀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우리의 부족한 배경지식으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대화를 이어나가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이를 보고있는 동안 그녀가 주인공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피 키문두 : "완주구는 비록 부친의 유해를 찾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독립운동 유공자들이 토지를 얻어 재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케냐에서 토지는 생명과도 같은데 케냐토지자유군은 영국으로부터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현재진행중인 카쿠지 회사의 이야기도 포함했다. 이를 통해 우리 영화는 과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도 연결되는 이야기로 끝맺음될 수 있었던 셈이다."

- 사실, 현재 케냐인들이 영국 다국적 기업인 카쿠지 소유의 대규모 토지를 두고 싸우고 있는 평행선상의 이야기도 놀랍다. 특히 1962년 13개 지역 주민들을 쫓아낸 후 카쿠지회사에 994년간이나 토지를 임대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사실상 영국의 케냐 식민화는 지금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속되고 있는 셈 아닌가. 현재 상황은 어떤가.
미나 난지 : "케냐의 국가토지위원회는 토지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좋은 의도로 설립되었지만 유엔처럼 권고만 할 수 있을 뿐 강제력은 없다. 케냐에서 대법원은 좋은 편이지만, 하급 법원은 부패에 매우 노출되어 있어서 카쿠지 같은 대기업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원주민 커뮤니티는 카쿠지를 영국 법원에 제소했고, 배상판결로 승소했지만 또다시 소송을 제기 당했다. 참고로 이 회사는 아보카도, 마카다미아, 블루베리, 목재를 수출해왔는데, 유럽의 슈퍼마켓 체인점들은 심각한 인권 침해를 이유로 효과적인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 전에는 6만 명에 달하는 백인 유럽 정착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이들의 거취는 어떤 상황인가.
미나 난지 : "지금 그 숫자는 잘 모르겠다. 아마 더 적을 것 같긴 한데,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다. 그들은 엄청난 규모의 땅을 소유하고 하인들을 거느릴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가족이 대를 이어 내려와 4대~5대에 이르렀고 그 땅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 현지인들을 강제추방했던 것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아직도 수도 나이로비에서 30분 거리에 '화이트 하이랜드'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는 여전히 대부분 백인 공동체가 살고 있다."

- 독일과 벨기에 정부는 최근 과거 식민지 범죄에 대해 사과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의 식민시대 범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사망했지만 찰스 국왕은 작년에 소심한 사과를 했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흐름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나? 주로 BLM 운동 덕분이라고 보나.
미나 난지 : "딱히 그렇게 보기 어렵다. 이런 역사정의운동은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예를 들면, 2004년에 약 40명의 마우 마우 그룹이 영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영국 정부는 자신의 과거 범죄를 시인하지 않았지만 소송없이 합의를 결정해 모든 이들에게 4000달러를 지불했다. 이후 2만 명의 마우 마우족이 또 다른 소송을 제기했지만 케냐측의 준비가 너무 미비한 탓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배상에 대해 생각하는 단체가 더 많아졌다."

- 케냐의 한 영화감독이 서방 정부의 과거사 대응 중 좋은 예로 뉴질랜드를 언급했다. 즉, 저신다 아던 전 총리가 원주민들에게 진정성 있게 사과했고 그들의 관습도 존중했다는 점을 꼽은 적이 있다. 이 의견에 동의하는지 아니면 더 좋은 사례를 알고 있는지.
미나 난지 : "저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과는 배상이라고 생각한다. 사과가 첫 번째 단계이지만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그냥 '미안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돈과 땅을 돌려주는 보상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딱히 좋은 예가 없다.

한편, 케냐에는 남아공처럼 진실과 화해의 과정이 없었다. 케냐가 지금 그렇게 한다면 정말 산전수전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나이가 꽤 있지만 진실과 화해 과정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큰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향후 계획중인 캠페인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미나 난지 : "교육과 토지정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묻혀 있던 역사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영국 정부는 이 역사를 감추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케냐의 새로운 독립정부와도 결탁하여 자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단 하나의 버전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케냐와 영국 양국에서 이 부분의 역사를 가르치고, 이런 관점이 잘 전달되도록 학교 교육과정에 영향을 주고 싶다. 영국 사람들은 여전히 영국의 식민통치가 위대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저지른 과거의 진실을 모른다. 그래서 교육은 중요한 문제다. 또다른 이슈는 토지보상권 옹호다. 케냐인들의 조상이 잃었던 똑같은 땅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배상차원에서 공평한 토지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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