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사극 <세자가 사라졌다>에는 이례적으로 강력한 대비가 등장한다. 대비 민씨(명세빈 분)는 임금 부자인 해종(전진오 분)과 세자 이건(수호 분)을 쩔쩔매게 만드는 권력을 휘두른다. 그는 세자를 교체할 힘도 갖고 있다.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 4월 20일 방영된 제3회 방송에서는 세자가 대궐에서 칼을 맞고 궐 밖으로 피신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전전(前前) 임금의 두 번째 왕후였던 민씨는 남편이 죽은 뒤 전처소생에게 핍박을 받았다. 임금이 된 전처소생의 박해로 유폐까지 당했다. 그러다가 반정(反正)이라는 이름의 쿠데타가 발생해 해종이 왕이 되면서 왕실 최고 어른으로 복귀하게 됐다.
 
가상 인물로 바라본 암투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MBN
 
이 사극은 해종이나 이건 같은 가상의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죽은 임금의 후처가 전처소생의 핍박으로 유폐되고 반정에 힘입어 복귀한다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인조 쿠데타(인조반정)와 광해군 폐위에 모티브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대비 민씨의 모습은 광해군의 젊은 새엄마인 인목대비 김씨를 떠올리게 만든다.
 
조선시대 대비의 권력은 두 남자와의 관계에 기초했다. 하나는 남편, 하나는 아들이다. 대비의 지위에 도달하기까지는 남편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죽은 임금의 아내였다는 사실이 그 힘이 됐다. 그런데 대비가 된 후에는 아들과의 관계가 훨씬 중요했다. 현직 임금의 어머니인 모후(母后)라는 점이 대비의 권력 행사에서 결정적이었다.
 
조선왕조 제9대 주상인 성종은 12세 때 임금이 됐다. 그래서 성종의 할머니이자 세조(수양대군)의 아내인 정희왕후 윤씨가 1469년부터 1476년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국정을 운영한 인물은 정희왕후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였다. 정희왕후는 자신이 한문에 약하다며 인수대비에게 넘겼지만, 인수대비의 권력을 지탱하는 본질적 요소는 모후라는 지위였다.
 
이복형인 인종 임금이 8개월 만에 사망한 뒤에 즉위한 제13대 명종의 당시 나이는 11세였다. 전처소생인 인종을 압박하던 문정왕후 윤씨가 아들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대왕대비 타이틀로 1545년부터 1553년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는 1553년 이후에는 공식 권한 없이 최고 권력을 이어갔다. 그가 사망하는 1565년까지 이 상태가 계속됐다.
 
문정왕후의 권력을 지탱하는 힘은 명종의 어머니라는 지위였다. 그가 1553년 이후로도 최고 권력을 이어간 것은 아들 명종을 계속 억눌렀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아들은 원치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음력으로 명종 20년 4월 6일자(양력 1565.5.5) <명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내가 없었다면 네가 무슨 수로 이렇게 됐겠느냐"고 아들을 혼내면서 권력을 이어갔다.
 
대비의 권력 행사에서 중요한 두 남자를 달리 표현하면 '죽은 남편'과 '산 아들'이다. 남편은 죽고 아들은 살아 있으므로, 대비의 권력 행사는 산 아들과의 역학 구도에 더 많이 기인했다. 아들과 싸우며 권력을 이어간 문정왕후의 모습은, 밉든 곱든 아들의 존재가 대비의 권력 행사에서 결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죽은 남편 대 산 아들

청나라 마지막 황제는 선통제인 애신각라부의다. 흔히 푸이로 불리는 이 황제의 전임자는 광서제(재위 1874~1908)다. 광서제의 재위기간은 실제로는 서태후의 시대였다. 이 시기 청나라를 이끌며 조선을 압박한 실제 주역은 광서제의 이모인 서태후였다.
 
그런데 서태후의 권력은 광서제의 이모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의 권력은 함풍제(재위 1850~1861)의 후궁이라는 지위에서도 나왔지만, 동치제(1861~1875)의 생모라는 지위에서도 나왔다.
 
그는 아들 동치제 때 섭정을 하면서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고, 아들이 죽은 뒤에는 조카 광서제의 섭정을 하면서 그 권력을 이어나갔다. 동치제의 모후라는 지위를 기반으로 광서제 시대까지 최고 권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세자가 사라졌다>의 대비 민씨는 해종의 어머니가 아니다. 이 드라마에서 그의 권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죽은 남편과의 관계 뿐이다. 그에게는 임금이 된 '산 아들'이 없다. 대비가 된 이후의 권력 행사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해종과 세자를 위협할 정도의 권세를 행사한다. 실제 역사에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을 드라마 속의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해종은 대비 민씨의 승인하에 임금이 됐다. 민씨를 유폐시킨 전임 군주가 폐위돼 일시적으로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비상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씨는 비상대권을 발동해 해종을 임금으로 만들었다. 이랬기 때문에 민씨의 권력이 해종을 능가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인목대비의 사례를 고려하면 판단이 달라진다.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킨 명분 중 하나는 광해군이 폐모라는 반인륜을 범했다는 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입장에서는 인목대비를 존중하고 그 지지를 얻는 게 절실했다. 또 인조의 정치적 권위가 역대 임금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보여주려면 선조임금의 왕후인 인목대비의 승인을 받는 게 당연히 필요했다.
 
그래서 인조는 인목대비를 극진히 예우했고 인목대비는 상당한 권세를 행사했다. 하지만 이 관계의 갑은 어디까지나 인조였다. 인조의 모후가 아닌 인목대비는 높은 예우를 받기는 했지만 수렴청정하는 대비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쪽은 인목대비가 아니라 인조였다. 인목대비의 위상이 아무리 높아졌다 할지라도 쿠데타를 주도한 인조를능가할 수는 없었다. 이 점은 폐위된 광해군의 신병을 놓고 벌어진 줄다리기에서도 확인된다.
 
1623년 4월 11일(음력 3.12)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다음날 인조가 즉위했다. 4월 13일, 쿠데타를 지지하는 인목대비의 교서가 발표됐다. 4월 22일, 광해군이 강화도로 유배됐다. 그런 일이 있은 뒤인 5월 12일이었다. 이날 인목대비가 주상 비서실인 승정원에 하교를 내려 광해군에 대한 신속한 처벌을 촉구했다.
 
인목대비가 승정원에 하교하는 일은 이 시기에 자주 있었다. 임금의 비서실을 자신의 비서실 쯤으로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인목대비가 자신의 위상을 꽤 의식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광해군이 유배된 상태에서 인목대비가 광해군에 대한 신속한 처벌을 촉구했다. 인조 정권은 이를 '광해군을 죽여달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음력 4월 14일자(양 5.12) <인조실록>에 따르면, 대신들은 "자고로 폐위된 임금의 죄가 아무리 중할지라도 그를 끝내 보전하지 못하면 세세토록 사람들의 책망을 피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대응했다. 폐주를 죽이면 안 된다며 인목대비의 요구를 배척했던 것이다.
 
인목대비의 권력 행사는 영창대군 재평가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정권하에서 목숨을 잃은 자기 아들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승정원에 하교했다. 인조 1년 윤10월 7일자(1623.11.28) <인조실록>에 따르면, 사헌부와 사간원은 어린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에게 공감을 표하면서도 '어린 나이에 요절해 가치 평가를 내릴 수 없는 사람에게 시호를 부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취지로 응수했다.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소민(昭愍)이라는 시호가 부여됐다. 인조의 결단이 큰몫을 했으리라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인목대비가 거듭거듭 권력 행사를 시도했지만, 견제와 반대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인조 정권은 인목대비를 배려하고 존중했지만, 구체적 사안에서는 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다. 모후가 아닌 대비의 정치적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목대비가 승정원에 직접 하교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은 그의 권력이 강했음을 보여주기보다는 그의 권력이 시스템화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행동은 그가 월권한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측근 그룹이 제대로 갖춰졌다면 월권으로 비쳐질 만한 행동이 그렇게 자주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인목대비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인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인목대비의 사례를 감안하면,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세자가 사라졌다>의 대비 민씨가 상당히 이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구의 드라마라는 점이 전제되기는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 일어나기 힘든 권력을 드라마 속의 대비가 행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드라마 속의 해종이 대비보다 훨씬 강한 권력을 행사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세자가 사라졌다>에서는 합리적 이유 없이 대비가 임금보다 훨씬 막강하다. 그래서 임금의 위상이 지나치게 낮게 묘사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실제로 사라진 것은 세자가 아니라 임금이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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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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