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컷
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컷영화사 진진
 
영화 <땅에 쓰는 시>는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철학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타미 준의 바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등 땅과 건축, 생태학적 관점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내는 정다운 감독의 세 번째 영화이자, 2018년에 정영선 조경가를 만나 5년여를 따라다니며 찍은 작업의 결과물이다. 정다운 감독은 선생님의 작품이 힘들 때 위로가 되어준 공간이라며 개인적인 애착도 크다고 전했다.
 
조경 1세대, 현역의 생명력을 담아
  
 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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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 조경가는 1973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 졸업생이자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 기술사이다. 1984년 서울시과 정식으로 첫 계약을 맺은 사례도 이때다. 그전에는 녹지담당 공무원이 맡았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아시아공원, 예술의 전당 설계 공모를 시작으로 여의도 샛강생태공원(1997), 선유도공원(2002), 서울 아산병원(2007), 경춘선 숲길(2016), 아모레 퍼시픽 신사옥(2016) 등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여전히 사랑받는 공간이 그의 손끝에서 살아났다.
 
꾸준히 한국의 미를 살린 조경을 담아 현역에서 뛰고 있는 조경가이자, 일하는 여성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새마을 운동과 올림픽, 아파트촌이 생기던 70-80년대 개발 붐이 한창이던 한국 역사와 함께한 산 증인이다. 202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조경계 최고의 상으로 불리는 세계조경가협회(IFLA) 제프리 젤리코상을 받았다.

종이와 펜 대신 손에 호미와 삽을 들고 땅에 시를 써 내려간다. 어릴 때는 다들 시인이 되리라 생각할 정도로 시를 좋아했던 소녀가 어느새 훌쩍 자라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과수원을 하셨던 할아버지를 따라 다양한 식물을 탐색하며 자랐던 시간은 고스란히 한국의 땅을 바라보는 정체성으로 체화되었다. 늘 자신의 조경 공간에 노란 '미나리 아재비'를 들인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결심을 상징하는 시그니처 들꽃이다. 옛날에는 길가에 흔하게 피는 꽃이었지만 환경오염 때문에 사라져 본인 정원에서 뽑아 심는다.
 
조경은 위로와 치유, 영감의 공간이 되어야..
  
 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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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정영선 조경가의 손길이 닿은 전국을 4계절에 따라 훑는다. 같은 장소라도 계절에 따라 다양한 옷을 바꿔 있는 자연의 신비로움이 피어난다. '겨울에 아름다워야 봄도 아름답다'는 말마따나 겨울에도 빛나는 정원을 꾸린다. 꽃과 잎사귀와 열매가 없어 볼품 없어질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스크린에 수놓는다.
 
양평 본가 정원에 심어진 한국의 다양한 야생식물이 이를 증명한다. "아이 예뻐!" 새벽같이 일어나 1년 내내 정원을 돌봐왔다. 누가 조경사 아니랄까봐 손톱에는 늘 흙이 끼어 까맣다. 꽃과 나무, 풀에게 말을 걸어주고 인사를 건넨다. 사람 보다 자연 속에 있을 때 더욱 행복해 보이는 까닭이다. 길가에서 주운 돌이 정원 설계도의 문진이 되고, 파스텔톤의 색연필로 도면을 그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을 존중하면서도 사랑하는 태도다.
 
여든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전국을 호미 하나 들고 돌아다니는 강철 체력의 근원은 국토와 자연, 사람의 조화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이다. 자연만큼 쉽고 친절한 교과서는 없다며, 아직도 노트를 만들어 자연을 관찰하고 공부하는 모범생이다. 자연이 선사하는 치유와 안정을 믿는 그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온전히 물려주기 위해 오늘도 달린다.
 
대표적인 장소가 2002년 만들어진 선유도 공원이다. 선유도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배경이 된 한강의 유서 깊은 섬이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서남부지역의 수돗물 정수장으로 쓰였다. 정수장이 이전하게 되자 시민들에게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는데 시설을 그대로 살려 큰 주목을 받았다. 선유도 공원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한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어떤가. 원래 주차장이었던 공간에 병원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울창한 숲을 조성했다. 아픈 사람이 마음껏 숲에 숨어 울어도 되고, 아픈 가족을 돌보며 힘들고 지친 가족이 위로받을 수 있고, 시간과 싸우는 의료진이 쉴 수 있는 마법의 공간이다.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는 식물 개체를 주로 심어 회복의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의도했다.
 
조경은 혼자서 안돼, 협력과 조화가 우선
  
 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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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역사와 문화를 자연과 연결하고자 한다. 땅을 찾는 사람과의 관계, 애착, 관계성을 따진다. 한반도를 하나의 사람으로 인식한 정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업 맡은 장소를 여러 번 방문해 땅의 근본은 뭔지, 어떤 테마일지 주변과의 조화를 살펴본다. 본인의 생각과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살려 정체성을 끌어내도록 한다.
 
과시하는 비싼 식물을 들이거나 서양의 정원처럼 인공적인 디자인은 사양한다. 순리대로, 편안하게, 보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예쁘고 비싸며 유행인 나무나 꽃을 심는 천편일률적인 조경에서 벗어나. 자연을 유지하되 조화를 이루고 보존하면서도 재해석한 한국적인 조경을 지향한다.
 
자연과 합일되는 옛 선조의 정원 정신을 본받아 경계가 불분명한 자연에 맞춘 멋을 신경 쓴다. 즉 주변 경관에 맞춘 조경이다. 삼국유사 속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말의 뜻처럼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전통의 미학을 근간으로 한다. 현재에 급급하지 않고 미래 세대가 누릴 가치까지 고려한 미래지향적인 철학이 중심이다.
 
땅과 사람의 관계성을 고려해 과거와 현대를 잇는다. 스스로를 '연결사'라 지칭하는 이유도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다보려는 모토와 인문학적 맥락 찾기일 거다. <파묘>를 만든 장재현 감독이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로 얼룩진 대한민국을 파묘하고 싶었다"라고 한것처럼. 정영선 조경사도 여전히 개발되고있는 국토를 매만지며 위로하고 다독이는 치유와 복원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영화 개봉과 함께 더욱 깊이 있는 관람을 원한다면 한국 조경의 역사이자 개인전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추천한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는 9월 22까지 진행된다. 정영선 조경가가 전하는 땅의 미학과 철학을 오롯이 느낄 기회가 될 것이다.
땅에쓰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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