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이하 <악존>)은 오프닝부터 기강을 세게 잡는다. 흔들림 없는 트래킹숏은 천천히 숲과 나무들을 지난다.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것 같기도 하고, 숲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뒷부분에 숲을 걷고 있는 하나의 숏이 붙지만 이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관한 명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미끄러지듯 숲에 빠져든 뒤 시작하는 <악존>의 이야기 구조는 익숙하다. 순진한 마을 사람이 신비로운 산에서 어떤 일을 겪는다. 우화라기보다 차라리 전래동화에 가깝다.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의 선택권을 넓힌다. 등장인물 중 누구의 입장에서 볼 것인지에 따라 영화를 다른 시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순진한 마을 사람 타카하시인가, 신비한 산의 수호자 타쿠미인가. 두 사람은 곧 더 넓은 의미로 치환되기도 한다. 끝없는 개발을 요구하는 도시의 삶에 치인 샐러리맨인가, 인간과 자연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원주민인가. 도시인은 행동보다 서류와 발표 자료인 언어로, 원주민은 말보다 자연과 합일된 생활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운다.
하지만 <악존>을 단순히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고 도식화하기에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도시인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데 그게 과연 합당한 결정인가 하는 점이다. 도시인이 자연에서 지켜야 할 금기를 어겼는가? 아니다. 오히려 원주민의 삶의 방식에 공감하며 이주를 꿈꾸기도 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원주민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가? 아니다. 이주 3세대라고 거창하게 소개하지만 그래봐야 100년 남짓이다. 숲을 따라 도로를 내고 건물을 짓고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쓴다. 균형이 중요하다지만 누구의 기준을 따른 균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