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신으로부터>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극영화는 대체로 허구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만들어진 이야기의 시작점이 현실에 놓여 있거나 실제로 경험한 어떤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인물과 사건은 다시 재구성되고, 배경은 스크린 속으로 옮겨지는 순간 다른 세상의 것이 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대상이 현실의 어느 시점과 동일하게 존재하지 못한다면 실제와는 같을 수 없다. 모든 극영화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작품은 자신의 허리를 내어 현실의 일부를 담아내기도 한다. 여기에서 영화가 자신의 무엇을 내어서 담는다는 표현의 뜻은 풋티지나 클립 영상을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말 자신의 이야기 속에 현실을 가져다 놓는 영화들이 있다.
신동민 감독은 감독 본인과 가족 구성원의 경험을 극영화 내부에 적극적으로 이식하고자 시도하는 인물 중 하나다. 첫 작품이었던 단편 <당신에 대하여>는 다큐멘터리의 화법에 가까웠다. 자신이 나고 자란 성남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와 변화해 가는 이미지 속에서 한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두 번째 작품인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는 극영화의 방식을 일부 차용한다. 세 개의 장으로 쓰인 이야기 속에서 영화는 한 인물의 삶을 투영함과 동시에 그 인물의 존재를 현실에서 드러내 새롭게 창조된 이미지와 혼합시키는 과정에서 관객의 시점을 교란시킨다. 영화에 현실을 이식하기보다는 현실에 영화적 기법을 섞어내는 듯했다. 그리고 이 작품 <당신으로부터>에서 감독은 비로소 극영화의 물성 아래에 현실의 그림자를 떼다 꿰맨다. 움직이는 영화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현실. 나는 그것이 신동민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서사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당신으로부터>는 한탄강 언저리에 뿌려달라던 아버지의 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부탁을 수행하거나 간직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존재의 어깨너머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동안은 정면에서 바라봐 왔지만 이번에는 빗겨 난 자리에서 바라보게 될 사람, 엄마다. 그를 위해 두 개의 이야기와 하나의 사실이 놓인다. 모두는 이어진 듯 이어지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다.
02.
영화는 세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정확히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1부에서 언급된 이야기가 2부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등장하는 식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다르다. 1부에서는 졸업 전시를 앞두고 있는 의상학과 학생 민주(강민주 분)가 등장하고, 2부에는 배우를 꿈꾸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승주(이금주 분)가 놓인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는 동민(신동민 분)과 그의 어머니 혜정(김혜정 분)이 있다. 감독 본인과 실제 그의 어머니가 직접 카메라 앞에 선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마을 운천을 찾는다.
처음 이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 1부와 2부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서로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1부의 민주가 엄마를 만나 과거 외숙모로부터 돈을 빌리고도 갚지 못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 장면(A)과 2부의 승주가 암투병 중인 외숙모를 만나 엄마가 빌렸다는 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A')을 이어 붙이고자 하는 시도다. 다시, 1부의 민주가 후배 어진을 만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B)과 2부의 승주가 장례식장 복도에서 사촌 언니를 만나 아버지의 장례에 대해 말하는 장면(B')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2부의 시작과 함께 1부의 민주가 아닌 낯선 인물 승주의 등장과 함께 모두 의미를 잃는다. '표현 그대로의 의미를 잃는다'기보다 '민주나 승주 한 사람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행위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극 중 민주와 승주의 이야기는 3부의 동민과 혜정을 위해 존재한다. 만약 3부가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앞서 존재하는 두 인물의 개별적 의미를 분명히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 존재하는 세 개의 챕터가 순차적이거나 병렬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부와 2부는 그런 상태로 놓여 있을 수 있으나, 3부는 그렇지 않다. 3부는 앞선 두 이야기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더 큰 세상에 가깝다. 민주와 승주가 경험하는 세상의 뼈대는 동민과 혜정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두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 위에서 감독 모자(母子)는 다음 장면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