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김훈·최질은 거란족 요나라의 군사적 압박이 계속되던 1014년 11월 25일(음력 11.1)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4개월 보름이 안 되는 1015년 4월 5일(음 3.14)에 현종이 서경(평양)으로 행차해 그곳 병력으로 김훈·최질을 제압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3년 뒤인 1018년 4월 23일(음 4.5)에 원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쿠데타 진압으로부터 3년 뒤에 사망했으니, 만약 그가 정변에 연루됐다면 이 점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사망 뒤에 나타났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평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왕후는 그 전까지 현덕왕후로 불렸다. <고려사> 원정왕후열전에 따르면, 현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종은 원정(元貞)이라는 시호를 부여하고 화릉(和陵)에 장사지냈다. 3년 전에 쿠데타를 도운 왕후라면 이렇게 우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현종시대의 역사를 담은 <고려사> 현종세가는 사망 당시에 원정왕후의 거처가 현덕궁으로 불렸다고 말한다. 이는 그의 거처가 김훈·최질 처형 이후에도 궁으로 불렸음을 의미한다.
왕족의 거처가 궁으로 불린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일이 원정왕후 사망 4개월 뒤에 있었다. 현종세가는 1018년 8월 30일(음 7.17)에 제3왕후인 원성왕후가 훗날 정종 임금이 될 아들을 낳자 현종이 어떤 방식으로 축하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종은 축하의 의미로 원성왕후의 거처를 원(院)에서 궁으로 승격시켰다. 이는 제1왕후인 원정왕후가 김훈·최질의 난 뒤에도 궁에 거처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준다. 반란에 연루됐다면 그의 거처가 현덕궁으로 불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원정왕후열전>에 따르면, 현종은 원정왕후 9주기가 되는 1027년에 의혜(懿惠)라는 시호를 별도로 추서했다. 왕권을 반군에 넘긴 왕후였다면 사후에 이렇게 대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위상이 막강했던 원정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