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덤: 엑소더스> 포스터 이미지

영화 <킹덤: 엑소더스> 포스터 이미지 ⓒ ㈜엣나인필름

 
세기말의 기억과 감각의 영화, 사반세기 만에 돌아오다
 
<킹덤>을 처음 본 건 국내 첫 공식 공개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야상영이나 서울에서 단관 심야상영으로 개봉한 극장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봇물 터지듯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지방'에서는 독립예술영화 전용 극장을 찾아보기 힘들던 시절 갈증을 해소해주던 민간 시네마 클럽의 '비합법' 비디오 상영을 통해서였다. 심지어 관람에 그치지 않고 너무나 재미있게 본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비공식 상영회도 여러 차례 벌이기까지 했었다. 북유럽에서 날아온 이 TV 드라마 시리즈가 왜 그리도 인상에 남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997년부터 1998년에 걸쳐 1, 2부가 국내 개봉했고 각각 5시간에 육박하는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영화 애호가들에게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모호한 결말을 넘어 감독이 이죽거리며 용용 죽겠지? 식으로 애매하게 처리된, 그러나 영화 속 배경인 종합병원 지하복도로 관객이 마치 빨려드는 것처럼 강력한 떡밥과 미끼로 가득했던 이 시리즈는 예정했던 3부 완결을 끝내 선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막연히 기다렸고 소문만 무성했을 뿐 이야기의 결말은 알 길이 없었다. 감독 역시 작업에 곧 들어가겠다고 인터뷰에 응할 뿐 감감무소식이었다. 게다가 1, 2부의 주인공 격인 드루세 부인과 헬머 박사 역할의 배우들이 고령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냥 포기하면 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아닌가.
 
하지만 느닷없이 3부 제작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정말 볼 수 있는 걸까 반신반의하며 혹여나 하고 다시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희미하게 들려온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2023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 소개를 거쳐 정말로 극장 개봉이 예고되었다. 게다가 몇 장면의 이미지만 실낱처럼 기억 어딘가에 박혀 있던 참이라 1부와 2부 흔적이 가물가물할 수밖에 없는 관객을 배려해 1부와 2부도 개봉일정에 맞춰 재상영하게 된다는 낭보까지. 어찌 되었건 <킹덤>의 운명을 확인하긴 하겠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제 정말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국내 개봉 소식에 영화를 택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기도 했을 테다. 감독의 악명 때문이다.
 
<킹덤> 전편들을 세상에 내놓던 20세기 말에도 파격적인 행보로 온갖 가십을 생산했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후 사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문제적 거장'과 '상종 못할 파락호' 사이 경계를 오가며 온갖 기행을 거듭했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촬영현장에서의 완벽주의를 표방한 가학적 작업방식, 서구에선 금기시되는 과도한 성적 표현과 아동살해 장면 삽입, 심지어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논란까지 일으켰던 감독이다. 웬만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고도 몇 번은 묻혔을 사고를 치고도 라스 폰 트리에는 여전히 수많은 비판 속에서 주목받고 있는 '살아있는 거장'이다. 그런 감독의 건강상태가 근래 상당히 좋지 않다는 정보가 전해지고 나니 어쩌면 감독의 대작을 목격할 기회는 이번이 거의 마지막 아닐까 하며 3부작의 마무리를 짓는 5시간 훌쩍 넘는 <킹덤: 엑소더스>에 도전할 결심을 마쳤다.
 
같은 것과 달라진 것, 킹덤 종합병원 속 숨은 그림 찾기 시간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파국을 막으려는 몇몇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 2부의 마지막은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채로 끝났다. 영화 DVD를 돌려보던 초로의 여성은 끈기 넘치게 영화 전편을 다 보고 나서 한숨 가득한 표정으로 내뱉는다. '이렇게 형편없는 엉터리를 내놓다니. 결말이 없잖아?' 아마 자포자기 상태로 언젠가 나오긴 할 테지 하며 막연히 기다렸던 전 세계 관객들을 대변하는 입담일 테다. 여성의 이름은 '카렌', 몽유병 증상을 갖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그는 관객이라면 보자마자 그리운 고향 찾아온 듯 반가울 킹덤 종합병원으로 향한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병원 건물이지만 유심히 보니 병동도 증축되었고 인테리어도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한 듯 환하고 깔끔해졌다.
 
카렌은 근사하지만 살풍경한 병원 입구에서 출입문을 찾는다. 열리지 않던 문이 갑자기 날아든 새의 인도로 개방되자 카렌은 로비로 들어가 '드루세 부인'을 찾는다. 하지만 진저리난다는 표정의 경비원은 꽤 오랜만에 드루세 부인 찾는 사람이 왔다며 모든 건 라스 폰 트리에라는 되어먹지 않은 얼치기 감독의 영화 내용일 뿐이라 쏘아붙인다. 그런 사람 한둘 본 게 아니니 알아서 하라며 경비원은 도로 들어가 버린다. 하지만 계시를 받은 듯 카렌은 거대한 킹덤 종합병원 내부에 진입한다. 모든 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1, 2부의 도입부를 차지했던 공통된 오프닝 영상이 다들 그리울 테다. 3부에선 안 나오겠네 하고 낙심하던 이들 앞에 파일럿 영상에 뒤이어 추억의 그 영상이 귀환한다.
 
킹덤 병원 지하에는 오래된 늪이 있다
한때는 여기서 천을 표백했다
그 시절에는 표백꾼들이 아마포를 얕은 물에 적셔
새하얗게 표백했다
안개처럼 자욱한 증기가 언제나 이곳을 뒤덮었다
나중에 킹덤이 여기 세워졌다
표백꾼 자리에는 의사와 과학자
이 나라 최고의 지성과 완벽한 기술이 들어앉았다
이 성취를 더욱 빛내고자 킹덤이라 이름 붙였다
이제 생명의 정의가 규정되고
무지와 미신은 두 번 다시 과학에 도전하지 못하리라
지나치게 오만해진 이들은
영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한다
영혼이 나타나면 냉기와 습기가 돌아오니
피로의 징후들이 조금씩
현대적인 견고한 건물에 드러나고 있다
아직 산 자는 모르지만
킹덤으로 향하는 입구가 또다시 열리고 있다
 
모든 것의 기원이자 출발이 되는 킹덤 종합병원 터의 숙명, 그리고 이곳에 닥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적 미래가 풀이된다. 사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인상적인 도입부는 '예언서'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한참 멀었다.
 
기본적인 구성은 13부작 TV 시리즈로 기획된 원래 각본과 편집 틀에 충실하다. 출연자가 소개되고 <킹덤>의 로고가 화면에 새겨진 뒤 3부의 제목인 '엑소더스'가 올라오고 뒤를 이어 각 회차별 소제목이 등장한다. 3부를 구성하는 5개의 에피소드 중 첫 번째이자 13부작 중 9번째 이야기의 부제는 '하프머'다.
 
새로 굴러가기 시작한 킹덤의 시간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요란한 굉음을 내며 헬리콥터가 병원 인근 비행장에 착륙한다. 응급환자 후송이나 VIP 순시인 줄 알았는데 그런 임무가 아니다. 항공관제 근무자들은 사전 예고 없이 멋대로 착륙한다며 항의하지만 근사한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는 '스웨덴 최고의 의사'가 이 병원에 신경외과 과장으로 부임한다며 '영광으로 알아라. 이것들아!' 일갈한다. 어안이 벙벙한 근무자 사이로 보무도 당당하게 병원으로 향하는 그는 '헬머 주니어', 1, 2부에서 드루세 부인과 함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헬머 박사의 아들이다. 부친은 끝내 덴마크에서 킹덤 근무 중 사망했고 아들은 아직 아버지의 죽음 원인과 사연을 알지 못하는 상태다. 그의 부임은 통상적인 이직이 아니라 부친의 사인 규명과 추도에 있어 보인다.
 
다른 한편 출근시간에 병원 로비에서 엘리베이터에 탄 신경외과 선임과장 '폰토비단'은 한참 승강기 내부를 살피다 타지만 어느새 '유후~' 소리와 함께 그의 표현대로라면 '승강기 요괴'란 별명을 붙인 휠체어 노인이 등장한다. 그는 폰토비단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귀신처럼 나타나 지치지도 않고 말을 붙인다. 과장은 넌더리를 내지만 피할 방도가 없다. 폰토비단은 갓 부임한 헬머 주니어에게 기괴한 스킨십을 한 다음 그를 직원회의에서 소개한다. '저 변태는 누구요?' 묻던 헬머 교수는 그가 신경외과 선임과장이란 말에 아연실색한다. 부친과 판박이로 스웨덴 출생에 자부심 가득한 헬머에게 신경외과 파트 속 덴마크 동료들의 행태는 모순과 비효율로 가득하다. 반가워야 할 신임과장 상견례는 팽팽한 신경전으로 가득하다.
 
예전 시리즈에서도 한국 관객들은 잘 알아차리기 힘든 덴마크 vs. 스웨덴 이웃사촌 간 불협화음은 이번 편에도 여전하다. 헬머는 스웨덴 의료정책을 예찬하며 신경외과 병동이 성 중립화와 인종다양성 분야에서 낙후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자 기존 직원들은 헬머에게 엿을 먹일 온갖 관습을 들이민다. 끝내 신고식 도중 만취된 헬머를 (고대 바이킹의 장례 의식처럼) 떼어낸 문짝에 올려서 찬바람 부는 옥상에 내버린다.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악동 기질이 어디 안 갔구나 하고 낄낄거릴 관객이 적지 않을 테다.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 등장한다. 25년 넘게 지나서 처음엔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무능한 병원장 '밥', 예전 과장의 아들 '모게', 과장 비서나 고참 간호사들의 등장은 전편을 본 이들에겐 반가운 인사에 다름없다. 그렇게 화면으로 재회하는 가운데 병원 복도를 헤매다 도저히 실제 있을 것 같지 않은 지하미로에서 환상을 보고 실신한 카렌을 덩치 큰 직원이 부축한다. 그의 이름은 '불더', 실제 이름은 다르지만 예전에 등장했던 보조원 '불더'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친절하게 카렌을 응대하며 병원에 닥칠 위험을 막기 위해 자신이 입원해야 한다는 요청에 수긍해 IT 부서에서 근무하며 해커 활동하는 '칼레'의 힘을 빌린다. 몽유병과 암야 공포증을 가진 카렌에게 무단으로 입원서류를 만들어준 덕분에 (국내도 종합병원에 바로 입원하기 쉽지 않은데) 어찌해서 신경외과 병동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한 회가 끝날 때마다 신랄한 표정으로 등장해 내용을 요약하고 풀어주던 감독은 민망하다며 커튼 뒤편에서 얼굴은 드러내지 않은 채 잘만 수다를 떨어댄다. 그저 자기자랑 같지만 은근히 이후의 실마리가 잠복한 내용이라 귀를 쫑긋 기울여야 한다.
 
서서히 드러나는 운명의 수레바퀴 속으로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킹덤>의 영화 속 세계는 2개의 이야기 축으로 굴러간다. 원념이 가득한 땅 킹덤 터에서 부활해 세상에 나오려는 유령과 악마를 막기 위한 영매와 협력자들의 활약 vs. (감독의 문명비판 차원인) 병원 내의 온갖 위선과 모순이 깨알 같이 연속되는 '신경외과 24시' 이야기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이 기본구성은 같은 틀로 유지된다. 하지만 1, 2부가 심령 미스터리 스릴러가 중심이고 병원 내 천태만상 풍자가 보조 역할이라면 이번의 <킹덤: 엑소더스>는 구조는 유지하되 후자가 점유하는 비중이 더 늘어난 느낌이다. 감독이 나이가 들면서 더 수다를 주체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25년 전에도 병원 개혁을 외치지만 실익은 전혀 없던 병원장은 여전히 무능하고 존재감이 없다. 그는 전국 특급병원 평가 보고서에서 지난 100년간 국내 최고 병원으로 군림하던 킹덤이 최초로 라이벌 병원에 밀려났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경쟁병원은 양자가속기 같은 고가의 첨단 장비에 아낌없이 투자하지만 원장은 무능한 데다 현재도 병원의 구조조정은 직원들의 반발로 답보 상태다. 그런 기득권 집단의 구심으로 전편에선 '킹덤의 아들들'이란 전문의 사조직이 활동했다면 현재는 '통증학회'란 공식 모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렇게 위세 처량한 종합병원장도 있을까 궁금해질 정도다. 10번째 에피소드 제목은 '학회는 춤춘다'다.
 
헬머 박사의 수난은 여전히 계속된다. 자신도 독선적이고 무례한 언사를 종종 내뱉지만 덴마크 인들로 가득한 신경외과에서 헬머는 소수자의 설움을 아낌없이 당한다. 그런 가운데 병원 내에 국적을 숨긴 스웨덴 인들의 비밀결사가 존재하는 걸 알게 된다. 볼보와 보포스 같은 스웨덴 기업을 찬양하며 이들은 지하 창고에 모여 단합을 도모한다. 하지만 의료사고는 속속 터지고 헬머는 곤경에 거듭 처한다. 그런 가운데에도 자신이 덴마크에 오게 된 목적인 부친 헬머 박사의 흔적에 다가서기 시작한다.
 
한편 카렌은 불더의 도움으로 병원 지하에서 (1부 마지막에 탄생한 바로 그) '리틀 브라더'를 찾는다. 그 가운데 이형의 존재를 출산한 '유디트'와 조우한다. 그리고 거대한 인체 내부처럼 연결된 병원 지하 공간 미로를 통해 마침내 찾던 존재와 마주한다. 그런 가운데 유령헬기가 (전편에서 거듭 출현한 유령구급차를 대신해) 불길한 긴장을 계속 고양시킨다. 병원 내에는 초자연적인 현상 빈도가 높아가고 기이한 일들이 빈번해진다. 한편 헬머와 다른 동료들 간의 신경외과 속 갈등도 고조되어 간다. 그렇게 혼란의 도가니로 변모해가는 킹덤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11화 '빅 브라더'-12화 '바르바로사'-13화 '엑소더스'로 의미심장한 표제처럼 킹덤을 둘러싼 비밀이 성탄절을 맞이해 겉잡을 수 없는 개방으로 향한다.
 
신랄한 풍자에 비해 평이해진 미스터리 심령물의 긴장감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300분이 넘는 장대한 상영시간 속에서 <킹덤: 엑소더스>는 전편에서 물려받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다. 현지의 복잡다단한 역사/문화적 지형을 꿰뚫는다면 포복절도할 코드가 가득하지만 1, 2부에 비해 비중이 좀 과도하다 보니 시리즈 전체의 중심축이라 할 비밀 해독과 '성불시키기' 과정이 가려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물론 감독 입장에선 '킹덤'이란 공간이 과거에 축적된 원한과 역사적 죄악의 지층 위에 세워졌고 그런 위악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현실 풍자를 강조하고자 한 결과물일 테다.
 
소소한 변화를 알아채는 건 장구한 분량 안에서 소소한 재미가 될 테다. 25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시차를 고려해 전편들의 등장인물이 재등장하는 건 반갑고 그들의 2세나 3자가 새로 나타나 기존의 캐릭터를 교체하고 계승할 때는 호기심이 앞선다. 시대 변화상을 감안한 장치나 인물 조합을 비교해보는 발견이 쏠쏠한 흥밋거리다. 거기에 감독이 냉소적으로 대하지만 깊이는 보장된 사회/문화/종교적 상징에 대한 은유도 추가된다. 수위도 높고 범위도 광활하다.

여전히 현대의학과 합리적 이성에 대해 라스 폰 트리에의 입장은 신랄하다. 병원장은 진정으로 병원에 필요해서 고가 장비를 갖추려는 게 아니라 허례허식에 가까운 감정에 과몰입하며 경비 절감을 위해 환자에게 제공되는 주스의 농도를 희석시키는 걸 집착한다. (그런데 이런 비용절감은 정부의 기조이기도 하다) 의료사고는 터무니없이 발생하고 환자의 뇌를 절개하는 수술 와중에 의사들은 감정싸움을 일삼는다. 병원 내에 중환자를 수용하는 비밀 아편굴이 등장할 때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물론 <킹덤>의 병원 풍경은 (영화 속 병원직원들이 강조하듯) 픽션의 상징적 풍자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헬머는 스웨덴 인 비밀결사에 '공격'을 제안하지만 어째 진행이 시원찮다. 입으로는 '적군파'와 '맨슨 패밀리' 같은 과격한 테러리즘을 운운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건 너무나 소박한 '태업'에 불과하다. 그것조차 이미 관료주의에 물든 병원 행정실무에 조금도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자신들이 뭘 어찌 해보려 해도 관행에 찌든 병원은 역설적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성 추문이 터지면서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들 지경으로 헬머 주변은 난장판이 되어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렌과 불더는 킹덤을 구하고자 분투한다. 하지만 이제 '도플갱어'가 등장해 그들을 훼방하기 시작한다. 킹덤의 부정한 기운을 세상에 풀어내려는 보이지 않는 힘이 가동된다. '바빌론의 후손'이 킹덤에 있다고 한다. 느슨한 것 같던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며 모두가 궁금해 하던 킹덤의 예정된 운명으로 질주한다.
 
유럽의 현재에 대한 지독한 농담 담은 완결판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영화 <킹덤: 엑소더스>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아마 <킹덤: 엑소더스>를 선택할 때 내가 과연 5시간 초과하는 영화를 멀쩡하게 소화 가능할까 체력적 고민과 함께 감독 라스 폰 트리에에 대한 비호감이 중요하게 작용할 테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망발을 일삼는 감독의 영화를 굳이 봐줘야 한단 말인가! 같은 이들의 입장은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할 테다.
 
실제로 <킹덤: 엑소더스>는 사반세기 전에 비해 꽤나 달라진 세상의 기준과 안 맞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런데 유심히 돌아보면 어느 순간에 감독이 실제로 그런 편파적 시각을 가졌는지 의도적으로 시비를 집요하게 거는 것인지 분간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일단 참인지 농담인지 헷갈리는 부분은 지역감정이 아니라 옆 나라에 대한 비 호감 환장파티다. 하지만 서구사회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3세계 인접국들의 다양성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유럽 각국의 미세한 결을 일일이 포착하지 못하는 한계가 다분하다는 걸 인정할 필요도 있긴 하다. 왜 저리도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 난리일까 묘한 기분이 들 테지만 우리 또한 중국이나 일본 같은 바로 옆 나라들과 국민감정으로 치고받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한 부분일 테다.
 
명백히 판단이 나눠질 부분은 헬머 박사가 신경외과 동료 '안나'와 엮이며 벌어지는 성추행 소송이다. 미투 운동이나 피해자 중심주의를 냉소적으로 재구성하는 모양새로 상황이 몇 차례고 계속되는데 분명히 상당부분 분량이 과도하게 많고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태도이긴 하다. 그래서 해당 분량 때문에 본 작품을 포기한다 해도 굳이 억지로 설득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감독의 의도를 존중하고자 살펴본다면, 사회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운동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혼란과 부작용에 대한 감독 특유의 불신과 분노의 복합적 감정이 통제 없이 쏟아지는 예시로 인식할 수 있겠다(동의가 아니라 이해의 차원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지지와 동의를 표명하면서도 실제로는 위선적인 사회 일각, 특히 엘리트 집단의 행태를 조명하는 데 집중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라스 폰 트리에는 처음부터 독선적이었고 금기에 대해 겁내지 않고 덤비기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래서 2010년대 이후 그의 작업들은 균형 대신에 세계 영화계에서 누구도 감행하지 못하는 온갖 '우상 파괴'에 브레이크 없이 폭주해 왔다. 그 결과로 감독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입혔고 본인 자신도 먹어야 할 욕과 오해로 쌓인 욕을 뒤집어썼다. 그런 가운데에도 마침내 30년이 걸린 '킹덤 유니버스'의 거대한 종막을 마침내 세상에 선보이기에 이른다. 아마 본인도 <킹덤> 시리즈가 자신의 Life Work라 인정했기 때문일 테다. 모두가 만족할 수 없는 결말일 테지만 그래도 마침표는 확실히 이론의 여지없이 찍었다는 데 일치할 테다.
 
<킹덤: 엑소더스>는 누군가에겐 과도하게 산만하고 뜬금없는 마무리로 폭주하는 3부 완결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에피소드에선 제법 길게 해설시간을 에피소드 말미마다 가졌던 라스 폰 트리에가 마지막 크레디트에선 한 줄로 정리하는 본인의 입장에 조금 더 주목해보면 좋겠다. '전부 도둑맞았다'라는 문장의 묵직함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무너져가는 유럽의 상황에 대한 절망, 좌절된 현실 유토피아에 관한 체념, 갈수록 더 나빠지는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감독의 머릿속에서 뒤엉켜 분출하고 있다는 것쯤은 영화를 보고 나면 체감할 수 있다. 세상과 자신에 대해 회의하고 좌절한 작가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 동안 불편하고 진저리날 지경으로 쏟아낸 혈토 같은 작업이다.
 
<작품정보>
킹덤: 엑소더스 The Kingdom Exodus
2022|덴마크|레전드 호러
2024.01.31. 개봉|307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라스 폰 트리에
출연 보딜 요르겐센, 미카엘 페르스브란트, 라스 미켈슨, 니콜라스 브로,
      튜바 노보트니, 니콜라이 리 코스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제47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제60회 뉴욕영화제 공식 초청
제66회 BFI 런던영화제 공식 초청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제40회 로버트 어워드 5개 부문 노미네이트
킹덤엑소더스 킹덤 라스폰트리에 레전드호러 덴마크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