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조현우가 한국축구를 벼랑 끝에서 구해냈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1월 31일 (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전에서 연장전까지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골키퍼 조현우의 선방쇼를 앞세워 4-2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8강행에 성공했다.
 
한국은 후반 1분 만에 사우디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경기 막판까지 끌려가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종료 약 1분 30초를 남겨둔 후반 추가시간에 조규성의 극적인 헤딩 동점골이 터지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조별리그에서의 부진으로 한 골도 넣지못했던 조규성은 사우디전에서는 선발명단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한국이 끌려가던 후반 19분 교체 투입되어 결정적인 순간에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내는 영웅으로 부활했다.

조규성이 살려낸 희망의 불씨를 이어받아 횃불로 타오르게 한 것은 조현우였다. 양팀은 결국 정규시간 내에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한국은 연장에서도 경기를 주도하며 파상공세를 퍼부었으나 수많은 찬스에도 더 이상 사우디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연장 후반 막판 사우디의 역습에 치명적인 실점 위기를 맞이했으나 조현우의 선방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조현우의 선방쇼
 
 30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전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기. 조현우가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라디프의 단독 찬스를 태클로 저지하고 있다.

30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전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기. 조현우가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라디프의 단독 찬스를 태클로 저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양 팀은 결국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분위기는 여전히 사우디가 다소 유리해 보였다. 한국이 비록 끌려가다가 동점을 만들기는 했지만, 경기 내내 사우디 골키퍼 알 카사르의 놀라운 선방쇼가 이어지며 승부를 끝낼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게 부담이었다. 심지어 사우디는 한국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노골적인 침대축구를 펼치며 경기를 승부차기까지 끌고 가려는 의중을 드러냈다. 승부차기에서도 확률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선축권을 사우디가 가져갔다.
 
하지만 한국에는 조현우가 있었다. 한국과 사우디는 1,2번 키커가 나란히 성공하며 승부차기에서도 2-2의 팽팽한 호각세를 이어갔다. 균형이 깨진 것은 사우디의 3번 키커 사미 알나지의 차례였다. 골문 왼쪽을 노리고 낮게 찬 슈팅을 조현우가 정확히 방향을 예측하며 몸으로 막아냈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가져온 한국은 손흥민-김영권에 이은 3번 키커로 나선 조규성이 침착하게 골로 연결하며 3-2로 주도권을 잡았다. 이어 사우디의 4번 키커 가리브의 슈팅이 같은 골문 왼쪽 방향으로 날라온 것을 조현우가 다시 한 번 몸을 날려 2연속 선방에 성공했다. 승리를 확신한 조현우는 선방 이후 관중석을 향하여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포효했다.
 
기세가 꺾인 사우디 벤치에서는 급기야 황당한 장면까지 나왔다. 사우디의 사령탑인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이 패배를 직감한 듯, 아직 승부가 결정되기도 전에 등을 돌려 라커룸으로 들어가버리는 모습이 중계화면에 포착됐다.
 
한국은 마지막 4번키커로 나선 황희찬마저 침착하게 슛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한국은 네 명의 키커가 실축없이 모두 골망을 갈랐다. 기적같은 대역전극이 완성되자 우리 선수들은 모두 달려 나와 얼싸안고 환호했다.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천당으로 올라온 클린스만 감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0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전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기. 한국 조현우가 사우디의 슛을 막아내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30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전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기. 한국 조현우가 사우디의 슛을 막아내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조현우로서는 2인자의 설움을 딛고 국가대표팀에서 무려 6년 만에 다시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조현우는 2013년 K리그 대구FC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2019년부터 울산 현대에서 활약중인 국내 정상급 골키퍼다. 국가대표팀에서는 2015년 울리 슈틸리케 감독 시절부터 발탁되기 시작했으나 A매치 정식 데뷔는 2년뒤인 신태용 감독 시절인 2017년 11월 14일 세르비아와의 평가전에서 늦깎이 데뷔전을 치렀다.
 
조현우가 스타덤에 오르게 된 계기는 2018년 러시아월드컵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현우는 불과 2-3년전까지 K리그 2부에서 뛰던 선수였고, 연령대별 대표팀에서는 주전경쟁에서 밀려 출전기회가 별로 없었던 무명에 가까웠다. 그런 조현우가 최종엔트리에 당당히 포함된 것만으로도 놀라운 사건이었는데, 심지어 신태용 감독은 러시아월드컵 본선에서 월드컵 유경험자 김승규과 아시안컵 주전골키퍼였던 김진현을 모두 제치고 컨디션이 좋은 조현우를 주전으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당시 많은 이들은 의아해했지만, 조현우는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실력으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해냈다. 비록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조현우는 대회 내내 눈부신 선방쇼를 선보이며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한국은 3경기에서 단 3실점만을 내주며 한국축구의 역대 월드컵 최소실점을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조현우의 지분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조별리그 최종전이었던 독일전에서는 압도적인 열세속에서도 독일의 무수한 슈팅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며 한국이 전 대회 디펜딩챔피언을 2-0으로 격침시키는 '카잔의 기적'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또한 조현우는 같은 해 열린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와일드카드로 출전하여 손흥민-김민재 등과 함께 한국이 2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2018년은 조현우가 명실상부한 국내 최정상급 수문장으로 자리매김했던 한 해였다.
 
하지만 순탄할 것 같던 조현우의 국가대표팀 커리어는, 이후 외국인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다시 운명이 뒤바뀌었다. 빌드업과 점유율 위주의 축구를 중시하던 벤투는 발기술이 더 뛰어난 김승규를 주전 골키퍼로 기용했고 조현우는 2옵션으로 밀려났다.

조현우는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도 최종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4년전과는 정반대로 이번엔 김승규에게 밀려 본선에서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 뒤를 이은 클린스만 감독 체제에서도 주전 골키퍼는 여전히 김승규의 몫이었다. 
 
이미 국내 최고의 골키퍼로 실력을 인정받은 조현우로서는 내심 서운할 법도 했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대표팀에서는 2인자로 밀려났지만 소속팀에서는 여전히 최고의 기량을 유지한 조현우는, 울산의 K리그 2연패에 기여했고 2017년부터 7년연속 골키퍼로 리그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리며 역대 1위에 등극할만큼 살아있는 레전드로 자리매김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고 했다. 이번 아시안컵에서도 최종엔트리에 이름은 올렸지만 주전 골키퍼는 김승규였기에 조현우가 출전기회를 얻을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그런데 김승규가 훈련 중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불의의 부상으로 조기 이탈하게 되면서, 조별리그 2차전인 요르단전부터 갑작스럽게 조현우가 주전으로 나서게 됐다.
 
하지만 조현우는 단기전의 러시안 룰렛이라 불리는 승부차기를 통하여 자신의 진정한 장점이 무엇인지를 증명해냈다. 두 번의 연이은 선방은 모두 상대가 실축하거나 운좋게 걸린 것이 아니었다. 키커가 공을 차는 방향을 정확히 읽어내고 몸을 날린 조현우의 정확한 판단력과 반사신경이 만들어낸 완벽한 선방이었기에 더 빛났다. 오히려 경기 내내 한국 공격수들의 무수한 슈팅을 막아내며 인생경기를 펼치던 사우디 골키퍼 알 카사르가 정작 승부차기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과도 대조를 이뤘다.
 
조현우는 경기 후 "승부차기에서 막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승부차기 연습을 많이 했고, 골키퍼 코치님이 내 판단이 옳다고 믿음을 주셨다"라며 "사전에 전력을 분석한 대로 판단해서 세이브가 나왔다. 앞으로 경기에서도 서로 믿으면서 좋은 결과로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8강에서 만날 상대는 또다른 우승후보인 호주다. 지난 16강전에서 호주는 약체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4골을 뽑아내며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사우디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전을 치른 한국으로서는 호주보다 휴식일도 짧아서 체력적으로 더 불리하다. 다득점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수비에서 호주의 막강한 공격을 얼마나 차단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조현우는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도 계속 주전 수문장으로 한국의 골문을 지키게 될 전망이다. 특유의 선방능력은 여전하지만 약점으로 꼽히는 발밑이나 빌드업 능력은 여전히 아쉽다. 사우디전 승부차기를 통해 얻은 조현우의 자신감이 계속 이어져야 한국의 우승 희망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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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우 승부차기 사우디축구 만치니조기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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