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고려거란전쟁> 관련 이미지.
KBS2
대조영이 싸운 중국측 당국자는 바로 그 무측천이다. 대조영은 무측천과의 대결에서 승리해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 고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이때 대조영 편에 서서 무측천과 싸운 민족이 거란족이다.
대조영이 무측천을 상대할 때 거란족도 무측천에 맞섰다. 이렇게 거들어준 결과로 대조영은 손쉽게 발해를 세웠다. 이로 인해 거란족은 불익을 당했다. 무측천과 연대한 돌궐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대조영을 도운 대가를 그렇게 치른 셈이다.
그처럼 7세기 후반에 한민족을 도왔던 거란족이 10세기 초반에는 한민족을 압박하는 세력으로 바뀌었다. 872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야율아보기가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에 부족을 통일하고 916년에 거란국을 세우면서, 이 유목민은 발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전의 발해 군주들은 한반도와 중국대륙만 신경을 쓰면 됐었다. 그랬던 것이, 거란족이 강성해지면서 몽골초원의 거란족까지 함께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발해의 운명을 책임진 군주가 대인선이다. 그는 거란족은 강성해지고 발해는 쇠약해지는 위기 국면 속에서 약 20년간 발해를 지켜냈다.
이 점은 송나라(남송) 사람인 섭융례가 엮은 <거란국지>에서도 확인된다. 야율아보기 편인 이 책의 태조본기는 924년 상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때 동북 지역의 이민족들은 모두 복종했지만 유독 발해만큼은 굴복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이런 상황을 종결지은 것이 926년 최후의 전쟁이다.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요나라 성종(요성종)이 1010년에 그랬던 것처럼,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도 926년에 선전포고를 한 뒤 자신이 직접 말에 올라 발해 침공을 지휘했다. 그가 이 전쟁에 명운을 걸었다는 점은 그 자신뿐 아니라 부인과 태자까지 참전시킨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926년 전쟁의 결과는 훗날의 사건인 조선과 청나라의 병자호란을 연상시킨다. 패배한 인조 임금은 천민의 옷으로 인식되는 푸른 옷을 입고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의 모랫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청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유득공의 <발해고>에 따르면, 대인선은 하얀 옷에 새끼를 메고 양떼를 이끌면서 도성 남문을 나왔다. 이는 군주의 지위를 버리고 평민으로 살겠다는 표시였다. 발해의 마지막 군주는 그런 방식으로 거란족에 항복했다.
거란족이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일은 이 유목민족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발해를 멸망시켜 몽골초원과 만주의 지배자가 된 거란족은 936년에 연주·운주 등의 16주를 확보해 중국 진출의 발판을 만들었다.
연운 16주로 약칭되는 이곳은 오늘날의 베이징 지역까지 아우른다. 몽골초원 국가가 이곳을 확보하면 북중국 진출이 용이해진다. 거란족이 이런 요충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발해가 동쪽에서 거란족을 견제했다면, 거란족이 마음놓고 북중국으로 남하하기 힘들었다. 거란족이 연운 16주를 차지하고 뒤이어 북중국의 지배자가 된 것은 926년의 사건에 힘입은 바 크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993년에 거란족은 제1차 여요전쟁을 일으켰다. 지금 <고려거란전쟁>에 방영되는 것은 제2차 전쟁이고, 강감찬이 지휘하는 전쟁은 제3차 전쟁이다.
거란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