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와 사이비 종교의 조합. 얼핏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무신론을 표방함에도 사실상 봉건왕조 체제에 가까워 보이는 북한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두 요소는 은근히 어울리는 조합이기도 하다. 탈북자 상당수가 남한 땅 정착과정에서 종교에 귀의하거나 도움을 받는다는 점도 감안할 만하다. <프레스>, <앵커> 등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의 팍팍한 삶을 장미빛깔 판타지와는 사뭇 다른 궤로 다뤄왔던 최정민 감독의 신작 <신세계로부터>는 바로 그 도발적인 소재를 결합해 낯설고 독특한 이야기에 도전한다.
죽은 이의 '부활'을 믿고 모든 걸 바치는 이들의 이야기
명선은 탈북여성이다. 어느새 3만 명에 달하는 탈북자 중 2/3 이상이 여성이란 통계를 보면 이제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경우다. 다만 명선이 '화신교'라는 기이한 신흥종교를 믿는다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그는 눈이 먼 화주(화신교 교주) 신택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둘은 의주 국경을 함께 넘어 남한으로 온갖 고생을 겪어가며 도착한 관계다. 찜질방에서 기거하던 둘은 조건이 맞는 집을 구해 시골로 이사한다. 공룡 엑스포로 유명한 경남 고성군의 작은 동네에 둘은 정착한다. 명선은 신택을 보살피며 식당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고단한 생활 와중에도 명선은 지극정성으로 기도한다. 그에겐 간절한 염원이 있다. 지성으로 기도하며 10명의 신도를 모아오면 죽은 아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화신교의 교리를 믿으며 명선은 온갖 수난을 감수한다.
새로 이사를 온 동네에서 탈북자가 정착하려면 만만찮은 수고가 필요할 텐데 화신교 포교를 하다 명선은 번번이 어렵게 구한 일자리를 잃는다. 게다가 포교활동 때문에 동네 교회 신자들의 눈총을 사 탄압에 내몰리기도 한다. 오직 죽은 자식을 되살려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견디는 명선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힘든 나날 가운데 명선의 노력 덕택인지 하나둘 화신교 교당(명선과 신택의 거처를 개조한 가정집에 불과하지만)에 발걸음이 늘어난다. 죽은 반려견을 되살리고픈 여학생, 보일러 수리하러 온 정비기사, 사고로 잃은 아들을 부활시키려는 중년 부부가 차례로 명선을 찾는다. 기도가 조금씩 응답하는 것인지 명선은 힘이 나고 웃음을 되찾아간다.
교세가 피어날 기미가 보이는 어느 날, 선배 탈북자 재숙과 영숙이 교당에 찾아온다. 둘은 북한에 있을 적부터 화주를 섬기던 이들이라 한다. 탈북 과정에서 화주와 만났던 명선은 한참 전부터 화신교 교리에 입도했다는 두 사람의 기세에 압도당하기 시작한다. 둘은 적극적으로 장단을 맞추며 포교에도 재능을 발휘한다. 어느덧 주변부로 밀려난 명선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하지만 둘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고 그 결과 큰 소란이 일어난다. 명선은 화신교 신앙에 거듭 회의를 느끼지만 달리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런 가운데 명선의 아들을 되살릴 수 있는 기한이 다가온다.
상업영화 문법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걷는 작가적 시선
최정민 감독의 영화는 늘 관객에게 불편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감정의 생채기라 해도 좋겠다. 이 감독의 영화는 굳이 들춰내지 않고 싶은 세상의 어떤 구석을 기어코 들여다보게 만든다. 극단적인 설정 같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사건과 인생들의 이야기를 대중적 기호에 영합할 생각 없이 쭉 밀어붙인다. 상업성이나 인기를 중시한다면 우선적으로 배제하고 시작할법한 소재만 골라내 중심에 둔다. 마치 도망치고 싶은 관객에게 이런 현실의 단면이 엄연히 가능하고 존재한다는 도발을 거듭 감행하려는 태도다. 호불호가 갈리는 건 당연히 감수한다. 영화를 볼 때나마 현실의 고단하고 골치 아픈 삶을 잊고 싶은 이들에겐 카운터 파트너 같은 태도라 하겠다.
단순히 통념상 이 영화를 본다면 무지하고 불쌍한 주인공이 너무나 어설픈 사이비종교 교주에게 놀아나다 신세 망치는 이야기의 전형일 테다. 설령 그렇게만 <신세계로부터>를 해석한다 해도 딱히 반박하기 힘들 정도로 영화 속 기본설정은 통속적으로 흐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펼치는 모호함과 의외성을 전개되는 리듬에 몸을 맡기듯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면 흥미로운 몇 가지 상상이 본격적으로 머릿속에서 시작될 테다.
영화 속에서 화신교의 실체적 진실 규명은 끝까지 모호하게 열린 상태로 남는다. (명선이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에게 성난 목소리로 항의하는 내용처럼) 내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남한 사회에서 화신교는 구체적 갈취나 사기가 입증되지 않는다면 탄압을 당할 이유는 사실 없다는 점이 영화 내내 명선을 괴롭히는 주민들의 확신에 찬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되며 오싹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10명의 신자를 모아야 한다거나 공양을 은연중에 종용하는 걸 보면 화신교의 교리 역시 평범한(?) 신흥종교의 전형에 불과해 보인다.
사회적 관심과 조명의 사각지대에서 배양되는 곰팡이처럼
교주 격인 신택의 면모는 어째 죽은 사람도 부활을 가능케 할 능력자로는 영 미덥지 못하다. 화신교 교리 상 교주는 신과 대화를 할 권능을 얻는 대신에 세속을 보는 눈을 잃는다고 한다. 하지만 명선까지 포함해 누구도 신택이 정말 화신과 소통하는지 알 수 없다. 줄곧 무어라 중얼거리긴 하지만 '방언'처럼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간혹 타인의 속사정을 투시하듯 맞추기도 하지만 그게 어떤 인과관계로 가능한지도 알 수 없다. 영화 후반에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은 그저 명선의 간절한 믿음이 불러온 '플라시보 효과'로 퉁 친다 해도 논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화신교당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늘어나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명선은 탈북 과정에서 아들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보다 나은 삶 혹은 북한에서 생존의 위협을 벗어나고자 목숨 건 탈출을 시도했건만 가장 지키고 싶던 존재와 생이별한 채 생면부지의 남한 땅에서 이등시민으로 입에 풀칠하는 삶이 과연 주인공이 원했던, 그리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을까? 명선의 모든 상황은 그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북한 체제에 대한 기대와 신념은 애초에 잃어버렸지만 차가운 남한 자본주의 사회 실상과 남쪽 동포들의 텃세에 질식당할 것만 같은 일상에서 명선이 의지할 건 자신조차 오락가락하긴 해도 이제 화신교라는 대상만 남은 셈이다.
이렇게 소외된 주변부 층위에 속한 채 마음 붙일 데 없는 이들이 신흥종교에 귀의하거나 범죄조직에 속하는 건 전 세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백인 노예상인에 의해 고향에서 생면부지 이방의 땅으로 끌려와 노예가 된 아프리카 흑인들이 부두교를 창시하거나, 북미대륙에 막 도착한 가난한 이민자들이 차별에 직면해 공권력 대신 마피아에 의존하는 건 딱히 드문 일이 아니다. 만약 공정하고 온정적인 정착과정 지원과 대우가 있다면 그런 부작용이 발붙일 자리가 있었을까. 명선 역시 소외된 채 상실감 속에서 의지할 자리를 애타게 찾던 그리 별나지도 않은 평범한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에게 남한 사람 중 아마 처음으로 온정적인 태도와 도움을 제공했던 보일러 기사 진수 같은 이들을 조금이라도 일찍 만났다면 명선의 삶은 어땠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처한 자리에 대한 냉소적 고찰
영화 속 드러난 화신교의 풍경은 우리가 종종 직간접적으로 접하는 흔해빠진 신흥 사이비종교 전형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선배 탈북 자매의 돌발행동 외에 화주나 명선이 확인된 범법행위를 딱히 저질렀다는 증거는 공개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길을 걷다 종종 마주치는 좀 극성스러운 포교행위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일정한 세를 갖춘 기성종교가 아니기에 보다 더 낯설고 의문스러울 뿐이다.
한국의 현대 종교가 부정적인 인식을 얻게 된 게 '그들만의 리그'로 신앙생활보다 사교모임 네트워크화 되었거나, 혹은 종교 교리가 아니라 '기복신앙' 면모에 치우치기 때문인데 화신교 활동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지역 교회 신도들의 극성스러운 괴롭힘 역시 종교인의 자세라기 보단 그저 텃세에 불과해 보이게 연출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탈북자에 대한 차별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떼법'을 구사하며 초법적 행태도 일상이다.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위력으로 명선을 괴롭힌다. 지역사회에 압력을 행사해 일자리를 빼앗거나 물리적인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횡포를 계속 눈으로 확인하다 보니 어느 순간 둘 사이에 과연 딱히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 것일까 보는 이들이 다 헷갈릴 지경이다. 물론 명선의 포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할 여지는 다분하다. (주인공은 결코 가련한 피해자로 그치지 않는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 주변에 포교 벽보를 붙이거나 하룻밤 숙소로 들어선 찜질방에서 허락 없이 선교활동을 일삼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선의 믿음 원천은 그저 죽은 아들의 '부활'이라는, 비상식적 맹목에서 유래할 뿐이다. 그런 주인공에게 관객이 감정이입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영화 내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기독교 교리와 연결되는 알레고리나 상징적 장면들이 유발하려는 이미지는 명백해 보인다.
신흥 사이비 종교 형성과정에 대한 상상력
명선과 마찬가지로 화신교당을 찾는 남한 시민들 역시 다들 마음의 상실감을 치유할 대상이 필요한 이들이다. 기성종교들 역시 사회적으로 불신을 적잖게 받긴 하지만 적어도 공식 교리로 '괴력난신'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극도의 슬픔과 공허함을 만회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평소라면 코웃음을 치며 비웃고 말 이야기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돌아보게 하기 마련이다. 상식과 합리적 사고가 당연할 것 같은 남한 주민들이 화신교당에 귀의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약삭빠른 탈북자들은 전혀 신앙에 관심 없이 오직 현세의 재물만을 좇는다. 이 기이한 풍경의 교차는 남북한 이분법적 경계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이쯤에서 (제작의도와 별개로) 화신교의 유래에 대한 역사적 상상을 펼쳐볼 참이다. 미약한 세에 비해 화신교는 나름대로 경전도 갖추고 교리도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주요 유인책이 부활이라는 점, 그런 화신교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명선이 거듭 내놓는 근거가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점에서 화주인 신택이 평안도 선천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게 일종의 복선이 될 수도 있겠다. 선천은 평양과 함께 분단 이전 북한에서 가장 기독교 세가 강했던 지역이다. 일본에서 근세에 무사정권이 기독교 신앙을 탄압하자 지하로 숨어든 신도들이 비밀 신앙생활을 이어갔지만 박해로 인해 원래 신앙 형태를 벗어난 것과 유사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다. 사제의 지도나 공식 교리 대신에 밀교화 되면서 원래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가 되어버린 것처럼 극단적 기복신앙 경향만 남은 게 화신교의 기원이 아닐까?
그런 가설을 전개한다면 이 북한에서 유래한 마이크로 신흥종교가 영화 속에서 전파되는 과정이 쉽게 설명된다. 남북 경계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의 허점과 혼란 가운데 그저 개개인의 선택과 판단이 남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화신교라는 신흥종교는 그저 하나의 '그릇' 혹은 '캔버스'처럼 남한사회의 어떤 어두운 단면을 묘사하는 장치에 불과해 보인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그 이면을 보기가 사실 두렵다. 하지만 거울을 눈 크게 뜨고 직면해야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 영화 역시 그렇게 쓰임새를 찾을 테다.
베테랑 연기자들의 활약으로 완성되는 영화의 인장
소규모 제작환경 속에서 필연적으로 감독은 배우들의 연기에 많은 몫을 맡기고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명선 역 정하담 배우와 화주 신택 역 김재록 배우의 기용은 모험보다는 검증된 연기자들의 가용한계까지 능력치를 뽑아내겠다는 태도가 명백하다. 정하담 배우는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마다 시선집중을 완수한다. 워낙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강렬한 이미지를 뿜어내는 배우이지만 이제 온전히 장편영화 한 편을 지탱할 능력치에 의구심 품을 수 없을 만큼 충분치의 활약이다. 약간의 부작용이라면 워낙 배우의 눈빛과 호소력이 강하다 보니 관객이 명선의 소망이 실현되길 기원하게 된다는 점이랄까. 중립으로 남아야 메시지에 더 부합되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만큼 제작진의 기대에 부합되도록 두 주연배우는 강렬한 연기로 영화의 스토리 전개를 온전히 떠받친다. 김재록 배우 역시 그간 주로 선보여온 개성 있는 조역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역량을 충분한 분량 확보를 통해 펼친다. 끝까지 사기꾼인지 광인인지 선지자인지 판단은 각자의 몫이 될 모호한 캐릭터를 이끌어낸다. 여기에 감독의 전작은 물론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한국독립영화 곳곳에서 목격 가능했던 진용욱 배우가 맡은 보일러 기사 진수의 활약도 든든하다. 생계형 '나이롱' 신도 자매들 역시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를 구현한다.
아쉬움이 없진 않다. 이야기의 개연성보다는 상징적 장면을 구현하기 위한 기능성 캐릭터의 소모나, (경남) 지역배경을 부각시키기 위한 관광지의 반복된 묘사가 굳이 그만큼 필요하진 않을 것 같은 공회전처럼 다가오는 편이다. 그러나 작지만 깊숙한 이야기를 주역 연기자들의 숨이 턱 막히는 조합과 군더더기 없이 돌파하는 태도로 끝까지 가는 건 확실하다. 다만 그렇게 구현된 영화 비전이 흔히 관객이 돈과 시간을 내어 영화관을 찾을 때 기대하던 결과와 엇갈릴 뿐이다. 호불호가 명백하게 갈릴 작업이지만 작가의 시선과 태도만큼은 명확하게 각인되는 영화다.
<작품정보>
신세계로부터 From the New World
2021|한국|미스터리, 드라마
2023.12.20. 개봉|99분|12세 관람가
감독 최정민
주연 정하담(명선 역), 김재록(신택 역)
출연 진용욱(진수 역), 명채미(재숙 역), 신나래(영숙 역)
제작 씨네마캣 픽쳐스
배급 필름다빈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