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군사반란이 발생했다.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이 자기 휘하 사조직 하나회를 이용해 육군참모총장 '정상호'(이성민)를 체포하고, 정국을 장악하려 한 것. 하지만 반란은 전두광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대통령은 협조하지 않고, 정 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반란 계획이 들통난 것. 이에 전두광은 절친 '노태건'(박태준)을 통해 최전선 전방 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반란군은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한다. 비록 육군 본부는 패닉에 빠지고, 국방부 장관도 행방불명이 되었지만 최후의 보루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 그는 서울 근방 전 부대에 반란 진압 명령을 내리고, 육군특수전사령관 '공수혁'(정만식), 헌병감 '김준엽'(김성균) 등과 진압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걸고 전두광과 전면전을 펼치기 위해.

<서울의 봄>, 박제가 아닌 거울이 되다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한국 영화 속 전두환은 공공의 적이다. < 26년 >, < 1987 >, <택시운전사>, <헌트> 등에서 그는 직간접적으로 타도의 대상, 응징해야 할 목표물로 등장했다. 영화라는 집단적 환상에서 사회 정의를 바로 잡는, 일종의 영화적 징벌인 셈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나치와 히틀러가 고통받는 것처럼. 

다만 이 '환상'을 삐딱하게 볼 수도 있다.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35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는 민주화 신화를 박제할 뿐이라고 느낄 수 있다. 단순히 민주화 운동 에피소드를 담거나, 전두환을 처단하는 내용이면 더 그렇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났기 때문.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민주적 정당성이 전무했다는 사실은 부정하면 안 되는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즉, 당연한 일에 영화적 심판이 필요한 당위성도 약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김성수 감독의 신작 <서울의 봄>은 퍽 흥미롭다. 물론 여전히 관성적인 대목이 있다. 총 쏘듯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전두환 정권의 비정상성을 비판한다. 자연히 민주화 항쟁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결정적인 순간 다르다.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아픔에 주목한다. 전두환을 막으려고 몸을 던진 이들과 그들의 실패에 초점을 맞춘다. 달리 말해 <서울의 봄>은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거울에 가깝다. 

실화를 전격적으로 공략하다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다. 역사적 평가가 끝난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 사실 어렵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사죄를 못 받은 만큼, 전두환에 대한 앙심은 불처럼 뜨거울 테니. 이에 <서울의 봄>은 일단 관객의 혼을 빼놓은 후, 서서히 관점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그래서인지 초중반부는 마치 전격전을 보는 듯하다. 좋은 의미로 정신이 없다. 

<서울의 봄>은 우직하다. 별다른 설명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선다. 전두광과 노태건, 그들에 맞서는 이태신과 정상호의 존재감만 보여준 후 바로 쿠데타 현장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진행 과정도 명쾌하다. 복잡한 작전 설명은 없다. 주요 군부대 한 두 개와 지휘관의 현황만 콕 집어 보여주고, 간단한 그래픽으로 상황을 다시 인지시킨다. 컷 전환도 망설임이 없다. 필요한 장면을 보여주면 곧장 다음 신으로 넘어간다.

이는 실화가 스포일러라는 근본적인 약점을 역이용한 각본, 연출, 그리고 편집이라 할 수 있다. 12.12 군사반란은 결과보다 과정이 낯선 사건이다. 학교에서 현대사를 배울 때 이 쿠데타의 결과와 영향은 외워도, 구체적인 과정은 시험에 잘 나오지 않으니까. 

<서울의 봄>은 이를 이용해 스포일러로 향하는 과정을 전부 물음표로 바꾼다. 그 덕분에 작전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막을 수 있을 듯 없을 듯하는 일련의 과정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도대체 이 작전이 어떻게 성공한 거지?'라는 의문이 강력한 서스펜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울의 봄>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며 국군과 반란군의 역사적인 밤을 생중계한다.

무리수까지 역이용하다

사실 전격전은 여러 무리수를 낳는다. 일단 캐릭터가 하나같이 평면적으로 묘사되고, 그저 장기짝으로 이용된다. 전두광의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권력만 좇는 악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태신은 대쪽같이 원리 원칙만 쫓는 인물이다. 그들은 두 진영의 충돌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똑같이 패배하는 역사를 다뤘고, 두 인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남한산성>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또 전두광, 노태돈, 이태신, 김준엽, 공수혁 다섯 캐릭터를 빼면 반군이든 국군이든 수동적이다. 도망치기 바빠서 직무를 유기한 국방부 장관, 전두광의 영도 없이는 아무런 대책도 못 내놓는 반군 장성, 상황 파악도 못하고 선제 조치를 못 취하는 국군 장성, 국군 통수권자로서 군을 통솔할 생각조차 안 하는 대통령까지. 총체적 난국이다. 그러니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억지로 고구마를 입에 쑤셔 넣는 느낌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울의 봄>은 쌓아 올린 긴장감과 분위기를 한 순간도 무너뜨리지 않는다. 답답하고,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지지만 작위적이라거나 과하다는 인상은 없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조연 캐릭터의 무능은 실화를 묘사했다는 변호가 가능하다. 국방부 장관 '오국상'(김의성) 등의 행적은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의 행적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 오히려 이 대목은 블랙 코미디로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기능도 맡는다. 

곱씹을 대상은 전두환이 아니다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무엇보다도 의도적인 빌드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두광이 악마처럼 보일수록 이채신의 선과 정의의 화신이 되고, 장성들의 무능함은 탄식을 자아낸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상황에서 탄식은 헛웃음으로, 이내 분노로 변한다. 이채신과 전두광이 경복궁 앞에서 대치할 때 국방부 장관이 재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울의 봄>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비로소 풀어놓는다. 단순히 전두환을 비난하는 대신, 왜 마침내 찾아온 봄을 잡지 못했는지 되묻는다. 개인의 권력욕과 일탈을 막을 시스템이 있었는데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질문한다. 규칙을 깬 사람에게는 이미 돌을 던졌으니, 실패한 원인을 되짚어보자고 말한다. 

<서울의 봄>은 다양하게 변주된 군인의 이미지를 통해 그 답을 내놓는다. 일부 시민이 군인의 탈을 쓴 채로 폭주해도, 다른 이들이 군인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이 반란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블랙 코미디로 보일 정도로 무능하고 수동적이었던 이들이 자기 자리만 충실히 지켰어도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한 시대를 상징하는 군인의 이미지 안에서 절망과 희망이 크게 충돌할수록 영화의 울림은 커진다. 이채신이 행주대교에서 반란군의 서울 진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가 부관의 만류도 무시하고 소규모 병력과 무기를 모아 결사적으로 전투에 나서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정만식, 정해인, 이준혁 같은 카메오를 활용해 반군에 맞서다가 쓰러진 군인에게 짧게라도 강렬한 임팩트를 준 이유이기도 하다.

제목이 '서울의 봄'이어야 하는 이유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렇게 보면 영화 말미에 군가 '전선을 간다'가 삽입된 이유도 유추할 수 있다. 노래 속 "상처 입은 노송"과 "이끼 낀 바위"라는 가사는 죽어간 전우를 추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라는 후렴은 과거 장병들이 사투를 벌인 후 죽은 자리에서 그들을 잊지 말자는 노래로 들리기도 한다. 

<서울의 봄>은 12.12 군사반란을 군가 속 전장에 비유한다. 설령 군사 정권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이채신의 패배를 되풀이자지 말자고 노래하는 셈이다. 또 군인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의 열의를 고취하는 내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어떤 방식으로든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침해하려 들면, 시민 개개인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저항하자고

이채신의 퇴장 장면에서도 그 함의를 읽을 수 있다. 이채신이 체포되어 서빙고 분실로 끌려갈 때, 러닝타임 내내 칼같이 전환되던 화면이 그 순간만큼은 천천히 페이드 아웃되며 그의 퇴장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제목으로도 '12.12 군사 반란'이 아니라 '서울의 봄'이 더 적절해 보인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만 원망할 게 아니라, 봄이 떠나간 이유를 곱씹어야 봄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 

마지막 스타일만 좋았다면

다만 <서울의 봄>은 용의 눈동자까지 그려 넣지는 못했다. 2시간 넘게 쌓아 올린 감흥을 마지막 순간 날려버린다. 영화는 하나회 기념사진을 보여주고, 하나회 일원이 각각 역임한 직책을 알려주며 막을 내린다.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내린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마무리는 다소 교조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감독의 말을 일방향적으로 전달하는, 시대를 역행하는 프로포간다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제작자나 감독이 관객을 믿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담긴 처연함과 답답함을 곱씹어 볼 여유만 챙겨 줬어도 <서울의 봄>은 더 오래, 은은하게 뇌리에 남았을 테니까. <서울의 봄>은 그럴 자격이 충분한 영화고, 2023년은 관객이 역사 속 선악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대이므로.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서울의봄 김성수 황정민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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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를 읽는 기자 지망생.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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