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염쟁이 유씨>무대장치
강지영
공연이 시작되자, 염쟁이 유씨가 등장했다. 현대식 염장이 답게 하얀 가운을 입었다. 잠시 후, 어색하다면서 가운을 벗었다. 이 연극은 배우 유순웅 또는 임형택이 출연하는 일인극이다. 그날은 유순웅 배우가 출연했다. 70대 노인 염장이 역이다. 배우 유순웅은 충청도 출생이라고 하는데, 말은 전혀 느리지 않다. 충청도 말이 느리다는 것은 편견이다. 그가 하는 일이 죽은 이를 염하는 일이다.
염이 무언가. 시신을 수의로 갈아입히고 베로 감싸주는 일이다. 염쟁이 유씨는 시신을 정성껏 닦아주고 한 겹 한 겹 베로 싸맨다. 그의 손길은 바쁘지 않다. 거칠지 않다. 죽은 이를 천천히 경건하게 위무한다. 그걸 바라보는 산 자는 고달픈 삶을 위로받는다. 언뜻, 내가 죽더라도 저렇게 마음이 따뜻한 염장이에게 염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잠깐 웃음이 나왔다. 염쟁이 유씨는 염하는 일을 하면서 겪었던 갖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유산을 두고 언쟁하는 자식들 얘기, 부모 먼저 세상을 뜬 자기 자식 얘기 등.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90분간의 교향곡 지휘자처럼, 삶과 죽음의 현장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관객은 눈물을 지으려다가는 배우의 연기력과 입담에 웃음을 터뜨린다. 언제 어떻게 극이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관객은 슬플 준비와 웃을 준비를 동시에 하고 있어야 한다. 아니 준비를 하지 않아도 염쟁이 유씨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의 연기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가 한 말 중에 지금도 귓전에 맴도는 말이 있다.
"삶이 차곡차곡 쌓여서 죽음이 되는 것처럼 모든 변화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보태져서 이루어지는 벱이여. 죽는 거 무서워들 말어. 잘 사는 게 더 어렵고 힘들어."
이 연극의 대본이 책으로도 나왔다길래 구매하였다. 김인경의 <염쟁이 유씨>(평민사, 2022). 내가 읽어본 책 중에서 가장 얇은 책이다. 전체가 40쪽이다. 책값은 7천 원인데, 인터넷으로 더 싸게 샀다. 포장지를 뜯자마자 소파에 누워 금세 다 읽었다. 책을 읽으니 유순웅 배우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늙은이가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젊은이가 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급변하기 때문에 늙은이의 농익은 인생철학이 필요치 않아서이리라.
예전 같으면 어른들께 물어볼 일을 인터넷이 다 해결해 준다. 이런 세상에서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건, 게다가 죽음을 임장하며 느끼고 생각한 바를 토로하는 염장이의 말을 듣는다는 건 뜻깊은 일이다. 오래 산 이의 인생철학이 묻어 나오는 대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책 속에 나오는 글 중에서 깊이 새겨두고 싶은 게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 그런디 죽어서 땅에만 묻혀 버리고, 살아남은 사람의 가슴에 묻히지 못하면 그건 잘못 죽은 게여. 또 남아 있는 사람한테도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한 게여. 가슴에 안느냐, 그냥 구경거리로 삼느냐. 억울한 죽음 앞에서 구경꾼처럼 구는 사람들은 종국에는 자기 죽음도 구경거리로 만들고 마는 벱이지."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산 자의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볼 대목이다. 타인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삼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도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니, 이 같은 말을 일컬어 촌철살인이라 하는가. 아울러,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김인경 작가가 말한 대로, 산다는 건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 게다. 무엇에 내 마음을 기울일 것인가. 염쟁이 유씨는, 죽는다는 건 목숨이 끊어진다는 것이지 인연이 끊어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인연을 맺고 살아갈 것인가. 깊어가는 가을밤, 삶과 죽음 그리고 인연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이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