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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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 칼의 소리>와 동시대인 1920년 9월 2일에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길림 지방에 마적 발호'에 등장하는 마적단의 규모는 상당했다. 3·1운동 이듬해에 발행된 이 기사 속의 마적들은 숫자가 5백 명을 넘었다. 지린성(길림성) 관군 병력이 토벌 작전을 위해 다른 지방으로 출장한 틈을 타서 마적떼가 8월 20일에 약탈을 벌인 사건에 관해 위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오백여 명으로 조직된 마적의 한 떼는 중국의 륙군 순경이 토벌키 위하야 디방에 출정한 틈을 타서 지나간 이십일 길림성 의란현 상삼성을 음습하야 먼저 감옥 문을 깨트리어 가처 잇든 죄수를 젼부 내여보내고 도윤공서(道尹公署)를 습격하야 불을 질넛슴으로 병(炳) 도윤은 단신으로 도망하얏스나 그의 딸과 계집 하인 두 명은 불 속에 타 쥭엇스며 큼직큼직한 상뎜은 많이 략탈되야손해가 막대하다더라."
마적떼가 감옥뿐 아니라 길림성장 밑의 도윤 일가족까지 습격해 그 집 여성 직원들과 도윤 딸이 화재로 희생됐다. 거리에서는 대형 상점들까지 약탈을 당했다. <도적: 칼의 소리>와 동시대에 활약한 마적들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기사다.
마적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꽤 강하게 각인됐다는 점은 일제강점기 유명 건달의 사례에서도 느낄 수 있다. 구마적이나 신마적으로 불린 건달들이 식민지 한국에 있었다는 것은 마적이란 말이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위압감을 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방성수 조선일보사 기자가 쓴 <조폭의 계보>는 1930년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시기 항일 주먹으로는 구마적과 신마적이 대표적"이라며 "경찰 자료에 따르면, 서울 왕십리와 서대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구마적(고희경)을 조선 주먹의 자존심을 지킨 인물로 보고 있다"고 서술한다. 왕십리와 서대문에서 활약한 서울 건달이 만주에서나 흔한 마적이란 표현으로 지칭됐다. 마적이 한국인들의 심리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될 수 있다.
마적들이 광활한 만주 땅을 활동 무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과 청제국이 1910년부터 2년 간격으로 연달아 멸망한 일과 관련이 있다. 동아시아의 두 주요 국가가 거의 비슷한 시점에 멸망한 일은 양국의 접점인 만주 지역에서 국가 공권력이 동시에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마적떼의 발호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청나라 멸망과 함께 중화민국이 수립되기는 했지만, 건국 직후의 중화민국은 내부적으로 불안정했다. 이 신생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베이징이나 난징을 무대로 전개됐다. 그래서 만주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본은 한동안 한반도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일본이 만주 점령을 향해 본격적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1927년부터다. 이런 상황들은 한반도와 중국의 접점인 만주에서 제3세력이 힘을 키우는 데 유리했다.
중국의 군벌 지도자인 장쭤린(장작림)이 만주의 지배자로 떠오른 것은 1919년경이다. 그 뒤로도 그의 만주 지배권은 완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적들과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수준에 그쳤다.
마적떼가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