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악귀> 한 장면.
SBS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어둑시니
요즘은 거의 회자되지 않는 어둑시니라는 단어는 1936년에 발표된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왼손잡이 행상인 허 생원이다. 장돌뱅이로 불리는 그는 이십 년이 넘도록 봉평장만큼은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방문했다. 봉평은 젊은 시절 그가 메밀꽃 하얗게 핀 달밤에 우연히 만난 처녀와 물레방아간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추억의 장소다.
허 생원은 장터를 돌아다니는 중에 동이라는 아들뻘 행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것과 동이의 외가가 봉평에 있다는 것과 동이가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다가 가출한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착찹한 감회에 사로잡힌 허 생원은 동이 어머니가 현재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발길을 돌린다.
어둑시니는 허 생원이 동이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는 장면에서 언급된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라며 "오랫동안 아둑시니 같이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메밀꽃 필 무렵>은 묘사한다. 혈육의 정이 일시적으로 시력을 강화시켜주는 인상적인 장면을 스케치하는 대목에서 어둑시니가 언급됐던 것이다.
1981년 9월 18일자 <조선일보> 12면 우단에 실린 소설가 김문수의 선운사 여행기에서도 어둑시니가 비슷하게 언급됐다. 소설가가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도솔산(선운산)에 위치한 선운사행 막차를 탄 것은 오후 6시 50분이다. "선운사 입구"라는 간판 글씨가 버스 헤드라이트에 비치고 뒤이어 "1박 7천 원의 호텔(분명히 호텔이었다)"에 들어가기 직전은 "밤 여덟 시가 훨씬 기운 시간"이었다.
소설가는 이 대목에서 어둑시니를 언급한다. "별자리는 머리 위에 턱 없이 가까웠고, 저만큼 어둑시니처럼 시커멓게 버티고 선 어느 산자락에선가 두견이 '솥 적다'고 풍년을 성화한다"고 묘사했다. 이효석은 시력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상태를 어둑시니로 부르고, 소설가 김문수는 시커먼 산자락을 보고 어둑시니를 떠올렸다.
언론인 리영희(1929~2010)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대담록인 <대화>에서도 어둑시니가 상세히 거론됐다. 2005년에 발간된 이 책에서, 1941년 생인 임헌영 소장은 평안북도 운산군 출신인 리영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유년 시절 평안도 말로 어둑서니에 대한 공포증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어느 지역이든지 어른들이 실제로 그것을 봤다고도 하고, 보지 않고도 겁에 질리기도 하지요. 저도 어렸을 때 도깨비다 하면 도망을 쳤는데, 선생님도 비슷한 체험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끔 어둑서니에 대한 꿈을 꾸신다고 하셨는데, 어렸을 때 거울에 비친 하나의 영상이 각인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기도 한다는 주장이 연상됩니다."
이 말을 들은 리영희는 자신이 꾸는 꿈을 다섯 가지로 유형화하다가 어둑시니에 대한 기억을 언급했다. "방금 임형이 얘기한 어둑서니의 꿈이 조금 색다른 것인데, 이건 소년기보다 더 앞선 유년기의 잠재의식이에요"라며 "평안북도의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겁줄 때 쓰던 달걀귀신이니 어둑서니 하는 엄청나게 무섭고 겁나는 허깨비에 쫓겨 온몸이 흠뻑 땀에 젖어 깨는 그런 꿈도 꾸지요"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유년 시절 평안도 말로 어둑서니에 대한 공포증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라는 위 대화 속의 언급은 1988년 6월 2일자 <한겨레> 1면에 실린 '백주의 평안도 도깨비 어덕서니'라는 리영희 칼럼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칼럼에서 리영희는 이렇게 회고했다.
"옛날 평안북도의 산간 마을에는 어덕서니라는 허깨비가 살고 있었다. 실체도 없는 것이, 무서운 괴물의 느낌으로 느닷없이 다가와서는 어린 것들을 겁주곤 했었다. 캄캄한 밤에 나타나는 도깨비의 일종이었다. 어덕서니는 있다고 생각해서 쳐다보면 점점 커져 하늘에 닿았고, 없다고 생각하고 보면 차츰 줄어들어 땅속으로 꺼져버렸다. 철이 들어 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어덕서니는 나를 겁주지 못하게 되었다."
커서 과학을 공부한 뒤에는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고 했지만, 76세 때 발간된 <대화>에서 그는 지금도 어둑시니 꿈을 꾼다고 말했다. 유년 시절에 한밤중에 집밖을 나섰다가 어둠이 꿈틀대는 듯한 느낌으로 인해 생긴 공포심이 꽤 오랫동안 지속됐던 것이다. "실체도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을 줬는지 알 수 있다.
어두움에 대한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