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틸샷
소니픽처스코리아
이 결정으로 인해 피터는 상사에게 구박받는 사진기자, 여러 개의 알바를 동시에 해야 하는 가난한 학생, 연애 사업도 신통찮은 외톨이가 된다.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새로운 빌런과 마주하게 되는 등 고난은 끊일 날이 없지만 훗날 손해를 보더라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희생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스파이더맨이 친절한 이웃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그가 겪는 공식 사건의 유무가 아닌 당장에 최선을 다하고 애쓰는 간절함 덕분일 것이다.
마일즈의 차별점도 간절함에서 비롯된다. 스팟은 얼굴(=정체성)을 잃고 말한다. 더 많은 구멍을 만들면 된다고. 점박이였던 스팟은 더 많은 구멍을 얻고 구멍 자체가 되어 익명성의 세계로 숨기로 결정한다. 정체성을 잃은 건 스팟만이 아니다. 지구 2099의 스파이더버스에서는 수많은 스파이더맨이 등장하지만 가면 속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건 소수다. 멀티버스의 특징이 드러나는 생김새지만 그것만으로는 개개의 특징을 알 수는 없는 수많은 스파이더맨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정체성을 잃은 군중이 되어버린 스파이더맨 무리는 공식 사건을 포기하는 단 하나의 스파이더맨이 되려는 마일즈를 제지하러 달려든다.
그웬이 스파이더맨으로 활동하는 지구 65에 나타난 르네상스 시대의 벌처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예술품들을 파괴하며 말한다. 이딴 게 무슨 예술이냐고.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과거의 영광된 순간을 지속할 수 없는 물건들이다. 벌처의 입장은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보는 관객들과 다르지 않다. 샘스파, 어스파, 톰스파를 각각 재밌게 봤더라도 그게 지금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보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차별화된 마일즈의 서사가 성립되지 않으면 존재 이유도 없다.
마일즈는 무슨 일이든 시작은 있다는 믿음으로 '내 이야기는 내가 쓰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겠다는 각오. 공식 설정이라는 쉬운 길이 있지만 거부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겠다는 결정은 마일즈가 익명성의 가면을 쓴 빌런 지점도 아니고, 떼로 덤벼드는 무수한 스파이더맨의 하나가 아니라는 증거인 동시에 이 시리즈가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