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리와 로키타> 포스터

영화 <토리와 로키타>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스타일'을 넘어 시대의 진실을 쫓는 거장의 신작
 
한국에서도 세계적 거장으로 공인된 다르덴 형제의 이름은 하나의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21세기 초부터 이들의 영화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스타일은 국내 영화전공자들에겐 한 번씩은 모사나 습작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카메라를 고정시키지 않고 들고 찍는 '핸드헬드' 기법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흔들리는 인물과 화면이 영화 속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경지에 이르는, 일명 '등짝의 언어'로 불릴 만큼 절묘한 표현기법 등은 국내 숱한 학생독립영화에서 현재도 수많은 사례를 양산하는 중이다. 다르덴 형제의 작품 세계에 담긴 깊은 철학이나 사회적 발언에 대한 관심과 접근법 관련 조명 대신에 지나치게 테크닉과 형식주의에 천착한다는 비판도 나올 지경이다.
 
물론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은 상당 부분 그들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되게 놓지 않는 사회문제 조명을 소재로 삼는 작품들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근래 국내 개봉영화 중 가장 다르덴 형제를 호명하게 만들었던 작품일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 역시 그들의 자장 내에서 한국적 현실을 접목해 완성된 일례일 테다. <다음 소희>는 전주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현장실습생의 죽음을 극화한 작품으로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을 충실히 재현해내 개봉관객수를 초과하는 문제제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개봉 당시 보도 자료나 인터뷰 등에서 공인된 것처럼 이 영화는 몇 편의 르포 서적을 참고한 바, 그중 유독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지은이 은유, 사진 임진실, 출판사 돌베개, 2019) 도서명이 <다음 소희>와 다르덴 형제의 신작 <토리와 로키타>를 연결하는 가교처럼 느낌이 '확' 왔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은 그들이 1978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지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몇 개의 테마를 꾸준히 연마해온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우리 세계의 문제를 시민의 일원으로 관찰하고 발언해 왔다. 그중에도 다르덴 형제의 작품들에서 필수재료처럼 등장해 온 '아이'와 '이민', '노동', 그리고 이 소재들을 결속하는 실타래 같은 '윤리'의 문제가 <토리와 로키타>에서도 진화와 변주를 거듭하며 꿈틀거린다. 이쯤 했으면 기존의 방식을 답습해도 뭐라 할 사람 몇 없을 텐데, 영화경력 45년 차의 형제 감독은 지금 세계의 쟁점과 판치는 불의를 향해 분노하고 비판하는 매개로 카메라를 활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남매를 갈라놓은 '체류증'이 낳은 우리 시대의 비극
 
 영화 <토리와 로키타> 스틸 이미지

영화 <토리와 로키타>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영화가 시작된다. 다르덴 형제 영화의 또 다른 특이점인 '롱 테이크' 장면이 시작부터 등장한다. 유럽 국가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이민자 문제가 연속된 화면 속에서 본 작품의 핵심 뼈대가 될 것임을 각인시킨다. 아프리카 계 10대 소녀 '로키타'는 자신이 난민 구제 대상이라는 것을 심의위원들 앞에서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절박함을 어필하지만 너 같은 아이 골백번은 심사해봤다는 무언의 표정 앞에서 금방 허물어질 판이다. 끝내 제대로 심사를 받지도 못하고 공황장애 증세를 보이던 로키타는 절차를 연기하고 돌아서고 만다.
 
로키타에겐 남동생 '토리'가 있다. 동생은 누나와는 달리 체류증이 발급되어 있다. 토리는 고향에서 주술사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종교적 박해를 받은 기록이 있었고, 그 때문에 아동에 대한 인도적 보호 대상으로 체류자격을 허락받은 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황이다. 남매는 같은 보호시설에 수용되어 있지만 둘의 상황은 천양지차인 셈이다. 토리는 시설에서 생활하며 학교도 다니지만 로키타는 막연하게 체류자격 심사 통과만 기다리며 붕 뜬 상태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공식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다. 모든 게 불안정하고 며칠 앞을 점칠 수 없는 전형적인 떠돌이 난민 신세다.
 
합법적 일을 할 수 없을 텐데 로키타는 백인 요리사 벨팀이 일하는 식당 손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배달을 하며 푼돈벌이를 한다. 그런데 배달하는 품목이 식당에서 취급하는 피자나 기타 음식 종류가 아니다. 벨팀은 주방장을 맡고 있지만 마약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조직의 거래책임자이기도 하다. 벨팀의 고객들에게 마약을 배달하는 게 로키타에게는 몇 안 되는 수입원이 된다. 시설에서 당장 의식주는 해결될 텐데 왜 그는 위험천만한 일에 뛰어든 걸까? 실은 로키타는 자신을 지중해 바다 건너 프랑스로 밀입국하게 도운 브로커 조직에 비용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다. 수금이 미뤄지면 브로커들은 로키타를 찾아와 협박하는 것은 물론, 학창시절 불량학생들이 몸을 뒤져 숨겨둔 돈을 뺏던 것 마냥 수색하는 것도 서슴없다. 게다가 로키타는 변변한 수입이 없는 고향의 가족들에게서도 송금 압박을 받는다.
 
토리는 그런 누나를 묵묵히 위로하고 챙긴다. 곧 체류증이 나올 거라며 함께 말을 맞춰 반드시 성공하자고 남매는 다짐한다. 하지만 정식 심사에서도 위원들의 치밀한 질문에 로키타는 허둥대며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끝내 탈락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떠나는 로키타 대신에 토리가 위원에게 항의하지만, 정말 사실이라면 유전자 검사를 받아보길 제안하는 충고는 무용할 따름이다. 둘은 친남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절박해진 로키타는 벨팀에게 체류증 위조를 문의하고, 벨팀은 대가로 자신들의 마약 공장에서 일하길 요구한다. 노동조건은 열악하고 공황장애가 있는 로키타는 폐쇄된 작업장에서 견디기 힘들다. 토리는 로키타와 면회를 요구하다 비밀통로를 발견한다. 어렵사리 둘은 재회하지만 위기는 끝나기는커녕 거듭 이어진다.
 
다르덴 형제가 응시하는 불의한 세계의 풍경
 
 영화 <토리와 로키타> 스틸 이미지

영화 <토리와 로키타>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토리와 로키타>는 형제 감독이 지속적으로 천착해온 세계의 과거와 현재의 모순, 그리고 바뀌지 않은 불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최전선이라 할 작업이다. 주인공들의 위태로운 처지는 다르덴 형제 특유의 강조방식, 남매의 불안정한 상황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 → 그로 인해 명민하게 포착되는 떨리는 주인공의 신체와 확장된 도구들 → 시청각적 이미지와 배경 속에 잔뜩 숨어있는 수많은 포석들로 선언적 강조나 교과서적 해설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주제와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한국에서 그저 특정한 테크닉으로만 소비되곤 하는 측면이 아니라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도로 진화한 정수로서 다르덴 형제 특유의 '스타일'을 확인하는 게 더욱 반갑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두 주인공의 처지로 압축된 수많은 이들의 고통에 대한 분노다. 토리와 로키타는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천신만고 끝에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그토록 꿈꾸던 1세계 선진국에 진입했다. '하라가스'라는 신조어를 만들 만큼 매년 5천 명 넘게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는 중에 사고로 수장되는 잔인한 현실에서 일단 토리와 로키타는 유럽 대륙에 도착은 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다 잘 풀릴 것이라 희망을 품었을 그 순간부터 이들은 그것만으로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야 만다. 그리고 이런 악순환은 21세기 들어 생겨난 게 아니라는 점이 더 소름끼치는 지점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는 잔혹한 극중 현실은 그러한 실제 역사적 상황을 정교하게 세공된 미니어처 마냥 구현해낸다.
 
토리와 로키타는 서아프리카의 소국 '베넹'에서 벨기에까지 먼 길을 왔지만 누구도 이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왜 하필 베넹일까? 호기심을 품은 관객이 조금만 조사해보면 다르덴 형제의 주도면밀함이 곧 확인된다. 베넹을 비롯한 서아프리카 상당부분은 과거 프랑스 식민제국의 일부였다. 프랑스어 문화권인 벨기에로 스며들어 난민 신청을 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렇게 식민 종주국으로 밀입국해 체류허가만 동아줄처럼 학수고대하는 10대 남매에게 예정된 운명인 것처럼 잔혹동화가 펼쳐진다. 물론 이 정도라면 서구문명의 원죄가 낳은 숱한 현실 문제를 소재로 삼은 무수한 문화예술상품 중 하나에 그칠 테다. 거장의 심모원려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베넹은 과거 '다호메이 왕국'이라는 아프리카 토착국가가 번성하던 중심지역이다. 용맹함으로 유명하던 다호메이 왕국은 세계사에 다른 각도에서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현재 세계체제의 기원이 된 유럽과 서구문명 팽창을 향한 결정적 계기가 된 대항해 시대와 대륙 간 교역을 통한 '세계-경제' 형성에서 다호메이 왕국은 중요한 세력이었다. 바로 노예무역을 통해서 말이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삼각 무역에서 베넹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호메이 왕국은 아직 유럽인들이 뚫지 못하던 아프리카 정글 속 약소부족을 정벌해 잡은 포로를 상품과 교환해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세계 경제사를 공부할 때 이 낯선 아프리카 왕국이 유독 부각되는 이유다.
 
그런 베넹의 역사를 약간만 이해한다면, <토리와 로키타> 속에서 로키타가 밀입국 브로커들에게 당하는 착취는 곧 같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던 다호메이 왕국을, 벨팀을 비롯한 마약조직에게 당하는 혹사는 선조들이 끌려가 당했던 만리타향의 광산과 농장을 떠올리게 만들 게 분명하다. 굳이 학술적인 설명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능수능란한 경지에 이른 거장들의 영상언어는 견고하게 구축된 장치를 통해 노예노동과 착취가 이제는 공식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에서 여전히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잔인한 진실을 목격하게 만든다.

특히 베넹의 경우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로도 내전이나 부정부패 때문에 자업자득으로 힘들게 산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국가임에도 식민지 시절부터 물려받은 빈곤을 못 떨쳐내는 나라라는 점 또한 살펴볼 만하다.
 
영화 속에선 여러 갈래로 상징과 암시효과가 활용된다. 밀입국 브로커 조직은 교회를 거점으로 활동한다. 로키타가 돈을 떼어먹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브로커들은 일요일마다 교회 꼬박꼬박 나오라고 압박한다. 정신적 구원을 위한 교회가 범죄조직의 온상이 된 셈이다. 그리고 로키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축인 벨팀의 식당에서 로키타는 마약조직의 끄나풀로 위험을 무릅쓰지만 돌아오는 건 고작 푼돈과 함께 피자나 포카치아 빵이다. 즉 팔리지 않아 남은 음식으로 벨팀은 선심을 쓰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얼핏 '먹방'을 위한 공간도 남매를 위한 온전한 안식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런 가짜 동아줄 사이를 토리와 로키타는 변변찮은 자전거에 의지해 질주한다. 그 질주는 자전거가 갖는 긍정적인 이미지와 무관한 대신, 남매가 처한 위태로운 처지를 온전히 표상한다. 하필 흔들리는 핸드헬드 촬영과 롱 테이크 기법에 절륜한 다르덴 형제의 방식 덕분에 그저 구간 이동을 위해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 주인공들의 내외적 상황을 고스란히 상징해내는 효과를 발휘하기에 이른다.
 
자신들이 속한 세계의 위선과 불의를 폭로하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 스틸 이미지

영화 <토리와 로키타>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다르덴 형제는 무려 15년 전부터 <토리와 로키타>의 시나리오를 준비해 왔다고 전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벨기에 소도시를 세트장처럼 활용해왔고, 그만큼 익숙한 동네 풍경의 미세한 변화에 착목할 수 있었음은 예상 가능하다. 노동의 존엄성이 추락하고 유럽이 자랑하던 복지제도가 무너지는 가운데, 이웃들의 불안과 분노는 이를 해결하지 않는 정부와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니라 낯선 새 이웃들, 즉 이주노동자나 난민에게로 향하는 것을 감독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목격해 왔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들부터 피해를 당한 것 또한. 그래서 유독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는 여성과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한동안 묵혀둔 시나리오가 부활하게 된 계기는, 착취당하는 미성년 난민 청소년들의 실태를 폭로하는 미디어 보도를 접하며 느낀 분노 때문이라고 감독들은 밝혔다. 흔히 밀입국 난민과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비난할 때 우리가 상상하는 건장하고 무례한 덩치 좋은 남성이 아니라 미성년 난민 청소년들이 현대판 노예로 전락하는 문제가 이제 서유럽에선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중이다. 그런 아동착취의 기원은 결국 유럽을 비롯한 '1세계'가 과거 제국주의의 원죄로 겪게 된 난민과 밀입국 이주의 현주소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토리와 로키타, 두 10대 남매의 운명은 유럽 사회의 잣대에 의해 잔인하게 갈라서는 운명이다. 자신들의 땅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정든 고향을 떠나 천대받는 타향으로 오고 싶은 이는 거의 없다. 이 당연한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1세계 국가들은 온갖 복잡한 기준과 척도를 설정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체류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결론적으로는 어떻게든 난민 수용을 최소화해 통제하겠다는 '비용'의 문제일 뿐이다.

로키타는 '경제적 난민'에 가깝기에 현재 유럽 상황에서 난민 인정이 이뤄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에 토리는 주술사로 의심을 받아 현대판 마녀사냥에 희생될 위험이 인정받아 '종교적 박해에 의한 난민'으로 수용된다. 베넹이 부두교의 본산이며 여전히 국민 과반이 이 전통무속신앙을 믿는다는 배경지식과 함께 왜 토리가 굳이 거짓말을 해서까지 로키타의 체류자격 문제를 돕는지 밝혀지는 대목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데도 로키타를 돕는 토리에 비해 어떻게든 1명의 난민이라도 덜 받으려는 부유한 선진국의 위선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상황을 처리하는 방식은 결국 근본적인 해결과는 정반대로 치닫는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은 밀입국에 상관하지 않고 최저임금 이하로 활용하는 유럽 각국의 정책이 도마 위에 오른 지 오래다. 서구 대형마트에서 적정가로 공급되는 농산물이 대부분 그런 아프리카계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의해 수확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결국 새로운 형태로 과거의 착취를 재구성하려는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인 것이다. 이 명백한 진실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과 연대를 촉구하는 다르덴 형제의 의분이 마치 증거자료 영상처럼 건조하게 관찰하는 카메라에 실려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더 무섭고 슬프게 다가온다. 영화 속 아이들은 죄가 없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선 인위적인 배경음악이 크게 활용되진 않는 편이다. 하지만 <토리와 로키타>에서는 몇 곡의 노래가 쉽게 잊히지 않는 감흥을 남긴다. 남매는 용돈벌이를 위해 식사하는 (대부분 백인인) 손님들 앞에서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처음 유럽 땅을 밟았을 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민요를 흥얼거린다. 토리와 로키타에겐 찰나의 기쁨과 이어진 환멸의 감정이 농축되었을 시실리 노래를 식당의 손님들은 그저 흥겹게 한 귀로 듣고 흘릴 뿐이다. 이 노래 곡조만으로도 베넹에서 지중해를 넘어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로 이어졌을 (피 한 방울 이어지지 않았지만 더 진한 동지애로 맺어진) 남매의 애환이 설명될 수 있다.
 
마약재배 공장에서 천신만고 끝에 재회한 남매가 함께 흥얼거리는 아프리카 언어로 추정되는 노래는 일체 자막해설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내용을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추리했던 이들은 감독의 설명에 맥이 빠지는 동시에 번개가 지나가는 것처럼 진실에 놀랄 법하다. 베넹의 고유 언어로 불러주는 (만국공통의) '자장가'라는 것이다. 그저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통렬한 장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정말 이 영화에는 허투루 들어가는 게 거의 없다.
 
한없이 성실하고 꾸준한 태도로 세상에 맞서는 거장
 
 영화 <토리와 로키타> 스틸 이미지

영화 <토리와 로키타>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얼핏 보면 소박하고 간단한 이야기를 작품들마다 큰 차이 없는 반복적 변주로 설렁설렁 찍어내는 것 같지만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나날이 정밀도가 높아져만 간다. 이들은 절대로 즉흥적으로 연출하는 법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은 장면 촬영이라도 사전에 몇 번이고 완벽한 리허설을 거쳐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해당 장면 시뮬레이션을 마친 상태로 실제 촬영에 임한다고 하다. 자신들의 고향 소도시를 무대로 거의 대부분의 연기자를 비전문 배우들로 채우지만 그렇다고 아마추어리즘에 내맡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실제로 이들의 영화에서 데뷔한 이들이 전문배우로 꾸준히 활약을 펼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 중 가장 수난당하는 대상일 로키타 역할은 100명의 후보를 직접 감독들이 고르고 골라 뽑았다고 밝힌 바 있다. 즉 즉흥적 요소는 다르덴 형제에게는 먼 나라 남의 일인 셈이다. 그렇게 테크닉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비전문 배우들의 (모든 건 계획대로) 의도된 자연스러움이 치밀한 준비와 어우러져 명작이 탄생한다. 결국 거장에겐 배워야 할 기본이 존재하는 법이다.
 
<토리와 로키타>로 국내 첫 방문을 치른 다르덴 형제는 여러 인터뷰에 응했다. 그중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아마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란 물음일 것이다. 해당 질문에 이들은 "벨기에에는 '관객을 영화가 좋아한다!'"라는 표현이 있다고 했다. 상업영화는 관객이 좋아할 법한 요소를 망라한 영화이지만, 독립예술영화는 반대로 관객에게 호기심과 충격을 선사할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체성이 명백히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답했다. 45년간 함께 작업해온 이들의 문답이 참 단단하다.

사실 놀랍지도 않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르덴 형제의 첫 출발은 벨기에 노동조합총연맹, 즉 우리나라로 치자면 민주노총에 연대하는 '노동자뉴스제작단' 같은 활동이었다(201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 당시 활동을 담은 초기 작품이 소개된 적 있다). 이들에겐 현실과 유리된 영화작업을 한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다르덴 형제는 유럽의 다른 거장들도 상당수 그러하듯, 서양 근현대사에서 제기된 윤리적 질문들을 고민하고 답하는 형태로 영화작업을 거듭해 왔다. 그들의 고뇌는 그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지식인이 내적 성찰과 사회적 발언으로 축적된 것이기에 그저 소재거리로 사회문제를 소모하는 경향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경지에 속한다.

그럼에도 다르덴 형제에게 수많은 한국 영화학도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노장들은 참 친절하고 자상한 태도로 꼼꼼히 현답을 선사했다. 주목받기 위해 먹힐 만한 소재나 유행을 따르지 말고 정말 본인이 하고픈 이야기를 만들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혼자 끙끙대지 말고 좋은 동료를 찾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아끼지 말라는 고언도 전했다. 그야말로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그들의 태도가 고스란히 압축된 것이었다. 그 최첨단에 <토리와 로키타>가 자리하고 있다.
 
<작품정보>

토리와 로키타 TORI ET LOKITA, TORI AND LOKITA
2022|벨기에, 프랑스|드라마/느와르
2023. 05. 10. 개봉|88분|15세 관람가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주연 파블로 실스(토리 역), 졸리 음분두(로키타 역)
출연 샤롯 데 브라위너(마고 역), 타이멘 고바에트(루카스 역), 알반 우카이(벨팀 역)
수입 및 배급 ㈜영화사 진진
 
2022 75회 칸영화제 75주년 특별기념상
2022 70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바스크 2030 아젠다상
2023 24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토리와 로키타 다르덴 형제 파블로 실스 졸리 음분두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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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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