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때 '진상'이었다.

뭐 지금도 나도 모르게 진상 짓거리를 하고 있을 수 있다. 진상의 특징은 본인이 진상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하는 짓이 진상 짓거리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느끼면 다행이다. 하지만 대부분 진상들은 본인이 하는 진상 짓거리를 일상적인 행동으로 당연시 여긴다. 때로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진상 짓거리로 얻었던 뜻밖의 이득을 정당한 권리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진짜 진상, '개진상'이다.

그 옛날, 3G 스마트폰이 처음 나오고 난 뒤 최신형 스마트폰을 구입했다. 3G 통신시설 기반이 막 확충되어 가는 시기라 인터넷도 잘되지 않고 통화도 불안정했다. 난 그때마다 수시로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이 상담원, 저 상담원, 그 상담원을 바꾸어 가며 대학교 때 배운 습자지 같은 얄팍한 법률 지식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부끄럽다.'

얼마 전까지 성격이 지랄맞아 인터넷 쇼핑을 통해 물건을 구매하면 배송 완료가 될 때까지 판매 과정을 추적하던 때가 있었다. 하루라도 배송이 늦어지면 판매처에 전화했다. 발송을 언제까지 할 것인지, 구매 시점에 오늘까지 보내주기로 했는데 왜 오지 않는지 항의했다. 신뢰의 원칙이니, 신의성실의 원칙 같은 상황에도 맞지 않는 대학교 때 배운 투명 비닐 같은 빤히 보이는 법률 지식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부끄럽다.'

사회 초년병 시절, 2년 넘게 사용한 서류 가방의 끈 고리가 떨어졌다. 가방을 구입한 대형마트 가방 코너로 가서 A/S를 요청했다. 담당 직원은 내 가방이 오래되어 지금 당장은 수선이 어렵고 맡겨 놓으시면 2주 정도 뒤에 수선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난 뭔 수선이 2주나 걸리냐며 방방 뛰고 진상 짓거리를 시연했다. 이 가방 하나밖에 없는데 2주 동안 어디에 이 많은 서류를 넣어서 출근할 것인지 터무니없는 질문을 했다. 사실 그 서류 가방에는 서류는 고사하고 달랑 칫솔 한 개와 볼펜 두 자루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담당 직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아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윗사람과 통화를 하고 왔을 것이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수선이 오래 걸려서 많이 속상하셨죠? 이번 경우는 저희가 잘못한 것이라 여기에 있는 현재 판매 중인 가방 한 개로 바꾸어 가시면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속상한 척하면서 옛날 가방을 버리고 새 제품으로 가지고 나왔다. 직원은 연신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했다.

'부끄럽다. 많이…'
 
영화 <다음 소희> 중 한 장면 온몸과 영혼을 갈아넣기 전 화이팅을 하는 사람들

▲ 영화 <다음 소희> 중 한 장면 온몸과 영혼을 갈아넣기 전 화이팅을 하는 사람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진상'의 어원

'진상'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진상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조선시대 공납제의 하나인 '進上'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지역의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특산물을 진상하는 과정에 있어서 관리의 협잡이나 뇌물, 착복 등의 민폐가 심해지고 이러한 진상의 폐단이 백성들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어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느낌이 강해진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어원에 관한 이야기로는 사농공상 체계가 확립된 조선에서는 교양 수준이 낮은 상인들을 상놈(쌍놈)이라 부르며 천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특히 막돼먹은 사람을 진짜배기 상놈이라는 뜻의 진상(眞商)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진상'의 의미는 부정적이고 듣기 거북하다. 누군가 나에게 '진상'이라고 불렀다면 분명 기분 나쁠 것이다. 예전에 나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통신회사 상담원, 인터넷 쇼핑몰 상담원, 대형마트 가방 코너 판매원은 나를 '진상'이라고 규정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고 '고객님'이라고 불렀지만 나의 거친 행동과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고 난 뒤 그 '고객님'이라는 글자 앞에 '진상'이라는 글자가 더해졌을 것이다. 단 '진상'이라는 글자는 '진상'인 나만 들을 수 없는 상대적 묵음 처리가 되고…

"온몸을 갈아 넣은 청춘들을 기리며"

뒤늦게 영화 <다음 소희>를 봤다. 어떤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위와 같은 짧은 문장을 남겼다.

소희는 대기업 하청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소희에게 전화를 한다. 인터넷을 해지하겠다고 마음먹고 전화를 하는 것이라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소희는 업무 매뉴얼이란 얄팍한 책 한 권 들고서 방어한다. 고객을 설득하고 회유하고 교묘하게 이쪽 저쪽으로 돌리고 돌리고 하는 것이 소희의 임무다. 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로봇처럼 사무적인 고객도 있고, 별 해괴한 개소리를 짖는 미친놈도 있다. 이렇게 온몸과 영혼을 갈아서 일을 했지만 제대로 돈을 받지도 못한다.

그런 소희는 온몸을 갈아서 일을 했고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또 '다음' 소희가 온몸과 영혼을 갈아 넣고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온몸을 갈아 넣고 사는 삶이 소희와 같은 청춘들만은 아닐 것이다. 모순이 가득한 사회제도 속에서 청춘들도, 40~50대 아저씨 아줌마들도, 그리고 많은 노인들도 남은 몸과 영혼을 갈아 넣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혼자 힘으로 버티기는 너무 힘든 세상이다. 영화 속에서 함께 춤을 추던 소희의 남자친구 태준은 경찰의 따뜻한 위로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다. 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택배회사의 상하차 작업을 하며 누구 하나 함께 버텨주었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

자꾸 나쁘게만 바뀌는 대한민국에서 혼자 힘으로 버티기는 너무 힘든 세상이다. 대한민국에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존중받을 일은 잘 없다. 그냥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라도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존중하며 위로를 주고받았으면 한다. 대통령이, 정치권이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이리 저리 갈라 놓아도 부디 우리끼리만이라도 연대의식, 뭐 그런거라도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
 
 영화<다음 소희> 포스터

영화<다음 소희> 포스터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다음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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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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