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은 님 첫 콘서트 음반에 수록된 '불나비'노동가요 '불나비'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민중가수는 단연 최도은님이다. 최도은님이 1988년 세창 물산 파업 현장에서 처음으로 '불나비'를 불렀을 때는 1980년대 전반기 '불나비' 곡과 달리, 빠른 템포였다고 술회했다.
그가 처음 펴낸 음반에 '임을 위한 행진곡', '인터내셔널가', '민중의 노래'와 함께 '불나비'가 수록돼 있다. 최도은님이 애창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불나비'인데 그 다음으로 애창하는 곡이 '혁명의 투혼'이다.
하성환
그러던 '불나비'가 빠른 템포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민중가수 최도은이 '불나비'를 처음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인천 지역 노동쟁의 현장에서였다. 당시 최도은은 인천 지역 노동 현장을 누비며 문화운동을 통해 강고하게 연대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 시절 최도은은 파업 투쟁 현장을 고집한 민중가수였다. 현장을 지키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자고 함께 투쟁했다. 그리고 노래로써 노동자들 스스로 연대할 수 있도록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그것이 그 시절 문화운동을 펼쳤던 민중가수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안치환이 만든 '철의 노동자' 탄생 배경이 된 한독금속 노동쟁의 현장에서도 최도은이 함께했다. 무려 3년이란 시간을 함께하며 직장폐쇄에 맞서 투쟁했고 결국 노동자들이 병역 특례 혜택을 쟁취하는 기쁨을 함께 나눴다.
최도은이 '불나비'를 처음 노동 현장에서 선을 보인 것은 1988년 인천 지역 세창 물산 노동쟁의 현장에서였다. 당시 세창 물산 노동자 한 달 임금이 8만 원이었는데 상당수 노동자들이 상업계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낮엔 공장에서, 그리고 밤엔 야간 고등학교에서 주경야독하며 강행군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졸 초임 교사 임금이 40만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한 달 임금 8만 원은 살인적인 저임금이었다. 세창 물산 노조 파업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절규이자 최소한의 생존권 요구 투쟁이었다. 최도은이 당시 불렀던 '불나비'는 빠른 템포로 투쟁의 열기를 한껏 북돋웠다. 나아가, 어린 노동자들에게 꿈을 잃지 않고 일어서서 앞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불나비'는 파업 현장에서 노동가요가 지닌 오묘한 힘과 생기를 노동운동에 불어넣는 문화운동 특유의 무기였다.
1980~1990년대 운동권 노래 가운데엔 대학생들 자신이 직접 만든 곡들이 많았다. '바위처럼'을 만든 유인혁(본명 안석희),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전남대 김종률,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작곡한 연세대 안치환, '동지가'를 작사, 작곡한 전남대 박철환, '단결투쟁가'를 만든 한국체대 김호철, '광야에서'를 만든 성균관대 무역학과 문대현이 대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