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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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잊어버린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가 남긴 격언이다. 어제의 역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교훈을 주지만 그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달렸다.
2월 14일 방송된 tvN 역사교양 <벌거벗은 세계사> 86회는 '일본의 전범들을 살려낸 위선의 도쿄재판' 편을 통하여 일본이 2차대전의 잔인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역사청산에 실패한 과정을 조명했다. 일본 전문가인 박삼헌 건국대 일어교육과 교수가 오늘의 강연자로 나섰다.
일본은 20세기 들어 제국주의의 길을 걸으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숱한 전쟁을 일으켰고 수많은 나라를 침략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민간인과 연합군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켰다. 당시 일본 포로수용소 사망자만 54만, 민간인 학살은 약 596만에 이르며 그 외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과 희생자를 포함하면 약 천만 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차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하면서 승전국인 연합국은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일본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도쿄 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1946-1948)에는 일본의 A급 전범 피고인 28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 재판에서는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다수의 전범 용의자는 석방되고, 심지어 최고 책임자였던 쇼와 천황은 재판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적인 논란에 휩싸였고 "도쿄재판은 역사상 최악의 위선"이라는 오명을 쓰기에 이른다. 일본의 전쟁 학살자들은 어떻게 법망을 피하여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2차대전이 마무리되어가던 1945년 7월, 승전을 눈앞에 둔 연합국 지도자들은 독일에서 '포츠담 협정'을 맺고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하여 논의한다. 여기에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일본의 전범들에 대한 재판실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츠담 선언 10항에는 '일본의 전쟁 범죄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명문화해놓기도 했다.
일본은 전쟁 기간동안 주민학살-성폭력-도시파괴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연합국은 이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포로학대' 문제에 대하여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 일본군에 의한 연합군 포로 사망률은 무려 전체의 23%에 이르렀으며, 이는 2차대전에서 발생한 포로 사망률 중 최고치였다.
하지만 여기서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아시아 국가들이 당한 피해와 보상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만다. 소외당한 대상에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많은 고통을 받았던 한국도 포함되어 있있다. 연합국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한 범죄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당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다수 보유했던 연합국들로서는, 이를 문제삼을 경우 제 얼굴에 침뱉기였기 때문이다. 이로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와 전쟁피해에 대하여 제대로 추궁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일본의 패망과 항복으로 2차대전이 막을 내리고 미국의 주도하에 일본으로 보내진 인물이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였다. 그는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사령관으로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됐고, 1946년 전쟁범죄 처벌을 위한 도쿄재판소 설립을 주도했다.
연합군총사령부는 국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를 제정하며 전쟁범죄의 범위를 규정하고, 전범의 구분 기준을 세워서 A, B, C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가장 책임이 무거운 A급 전범은 전쟁의 계획, 준비, 시행을 주도한 원흉으로 지도자들에 해당한다. 등급에 따라 전범들의 재판 장소는 달라졌고, 실무자들에 해당하는 B, C급 전범들은 주로 체포된 현지에서 즉결심판을 받았다. 일본인 타쿠야는 오늘날 일상생활에서도 스포츠 경기에서 부진한 선수를 질타하는 의미로 쓰이는 등 '전범'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은 총 118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중 대부분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 실제로 기소되어 재판정에 오른 인물은 고작 28명으로 약 5분의 1에 불과했다. 내각총리대신인 도조 히데키, 만주사변을 주도한 미나미 지로와 이타가기 세이시로,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의 주범인 하타 슌로쿠와 마쓰이 이와네 등이었다.
전범들은 도쿄재판에서 모두 무죄를 주장하며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은 죄가 아니며, 이들이 저지른 '평화 파괴자'라는 죄목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1945년 8월 8일 런던협정에서 만든 '사후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도쿄재판 검사들은 역시 런던 협정을 기반으로 나치독일의 전쟁범죄를 기소했던 뉘른베르크 재판(1945년 11월 20일)의 사례가 있다면서 전범들의 무죄 논리를 반박했다.
이에 전범측 변호인단은 "전쟁을 일으킨 게 죄라면 미국도 전범"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들고 나왔다. 전범측 변호사로 나선 벤 브루스 블레이크니는 '원자폭탄 투하'를 거론하며, "전쟁 중의 살인은 합법적이고, 죄가 아니다. 전쟁 중의 살인에 형사적 책임을 물은 사례는 없다. 우리는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범인(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을 암시)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범죄라면 미국도 전범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재판장은 원폭투하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평가하며 전범측 변호인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격적인 법정 공방이 시작되면서 피고인들의 A급 전범임을 증명하기 위한 각종 증거와 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검사측은 일본이 전쟁범죄를 시작한 시기에 집중했고, 만주사변을 일으킨 당시 일본군 관동군참모장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내부고발자의 증언으로 인하여 중국군벌 장쭤린 암살과 철로 폭발사건 자작극 등을 주도했음이 드러난다. 이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계획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고 '교활한 만주침략자'라는 악명을 떨쳤던 세이시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중일전쟁 당시 가장 악명높은 '난징대학살'은 일본군이 약 6주 만에 30만에 이르는 중국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충격적인 사건이다.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일본은 난징 함락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큰 피해를 받으면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온갖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들을 총동원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마쓰이 이와네는 당시 일본군의 중국 중부방면 사령관으로 이러한 부하들의 잔혹행위를 묵인하며 참상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마쓰이는 스스로 증인으로 나서서 "난징에서 약간의 불상사가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공적보고를 받은 바가 없으며 이런 사실도 종전 이후 미군 방송을 통하여 처음 알았다"고 주장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난징대학살의 목격자인 미국인 의사 로버트 윌슨은 당시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여성을 강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그의 병원에는 일본군의 총칼에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로 넘쳐났다고. 이밖에도 일본군이 난징에서 벌인 잔혹한 학살극을 목격한 증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와네 역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잔혹함에 극에 달한 일본군은 심지어 장교들끼리 포로들을 대상으로 '100명 목베기 시합'을 벌였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가해자들의 실명-사진 등이 1937년 일본 자국 언론인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버젓이 올라오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잔혹한 전쟁범죄를 전쟁용사의 무용담처럼 여기고 화젯거리로 삼거나 학교 교재로 활용했다는 증거들도 나왔다. 당시 광기에 물든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짐작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