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수(-)에 음수를 더해봐야 음수가 나올 뿐이다. 지난 8일 종영한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는 이 셈법을 애정 관계에 대입했다. 보통 드라마 속 계급이 '재벌 아니면 서민' 이분법을 취했다면, <사랑의 이해는> 숫자처럼 촘촘히 매겨진 '출발점 스펙트럼' 위에 네 남녀를 나열한 멜로 드라마다.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 포스터. 등장인물 네 사람의 계급을 계단 높이로 연출했다.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 포스터. 등장인물 네 사람의 계급을 계단 높이로 연출했다. ⓒ JTBC

 
등장인물 네 사람은 같은 은행에서 일하지만 각각 출발점이 다르다. <사랑의 이해> 포스터는 그들의 출발점을 계단 높이로 보여주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선 미경(금새록)은 '금수저'다. 그 아래에는 상수(유연석)가 있다. 그는 재력을 타고난 건 아니지만 명문대를 졸업한 정규직 은행원이다. 수영(문가영)은 고졸로 서비스직군에 입사한 은행 '텔러'이고, 맨 아래 칸에는 하청업체 청원경찰인 종현(정가람)이 있다. 양수(+)를 가지고 태어난 건 미경, 나머지는 모두 타고난 음수(-)를 상쇄하기 위해 애쓰는 계급이다. 음수라고 해서 다 같은 음수가 아니라, 나름의 위계가 있다.

이들이 일하는 은행의 지점장은 부잣집 딸 미경은 건들지 못하면서 고졸 사원인 수영엔 성희롱을 일삼는다. VIP 접대 자리에 불려 가는 것도 수영뿐이다. 수영이 술자리를 거부하자, 지점장은 "불편하다고 일 안 할 거냐?"며 화를 낸다. 윗사람 심기를 거스른 죄로 수영은 하루 종일 문서 정리만 하게 된다. 부당한 업무지시에도 직군 전환을 해야 하는 수영은 저항하지 못한다.

'사이다' 결말은 없었다
 
 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란 미경, 아버지의 힘으로 고속 승진을 하는 인물이다.

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란 미경, 아버지의 힘으로 고속 승진을 하는 인물이다. ⓒ JTBC

 
고졸과 대졸의 처우가 이렇게 갈리는 걸 보면 열아홉 살 때 얻은 학업 성적에서 비롯된 것 치고 가혹하지 않은가 싶다. 그런데 미경을 보면 더하다. 미경의 출발점은 아예 출생 전부터 남보다 앞서가기로 결정됐다. 물론 미경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명문대를 다닐 만큼 노력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앞서간 배경에는 알바 따윈 할 필요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집안 재력이 뒷받침됐다. 미경이 얼마나 운 좋은 사람이냐면, 그녀는 길 가다 우연히 주운 동전마저 단 8000개만 만들었다는 1998년산 500원 주화다.

미경은 타고난 운을 자각하지 못한다. 양수 앞에는 항상 '+' 기호가 생략돼 있는 것과 비슷하다. 원래 플러스는 잘 안 보이고, 마이너스는 눈에 띄는 법이다.

전형적인 로맨스에선 고졸 사원 수영을 대졸 사원 상수가 구원하는 백마 탄 왕자님 이야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수도 제 코가 석 자인 형편이다. 왕자님은 무슨, 자기 자신이 미경의 선택을 받은 신데렐라다.

홀어머니의 헌신으로 강남 8학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상수는 고교 동창들과 은근한 격차를 느낀다. 미경은 그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어 상류층으로 데려갈 줄 여자다. 상수에게 비싼 외제차도 아무렇지 않게 선물한다. 상수가 "나 아직 100퍼센트는 아냐"라고 내빼도, "1퍼센트만 줘. 나머진 내가 다 채울게"하는 자신감을 보인다.
 
 <사랑의 이해> 주인공 수영은 공들여 쌓은 모래성을 매번 스스로 무너뜨리는 인물이다.

<사랑의 이해> 주인공 수영은 공들여 쌓은 모래성을 매번 스스로 무너뜨리는 인물이다. ⓒ JTBC

 
<사랑의 이해>에 시원스러운 사이다 결말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구마 답답이 전개였는데, 메인 러브라인인 수영과 상수는 제대로 시작해보지 못하고 끝났다. 수영은 매번 밀어내지, 상수는 갈팡질팡 망설이고. 두 사람은 내내 자기 마음에 솔직하지 못했다. 음수(-)에 음수를 더하면 음수가 나온다는 걸, 은행원인 이 둘이 너무 잘 알아서다.

문가영이 연기한 안수영 캐릭터에는 '런수영'이란 별명도 붙었다. 매번 공들여 쌓은 모래성을 무너뜨리고 도망간다는 뜻이다. 15화에서 수영은 직군 전환에 성공했지만, 사표를 내고 사라진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영의 선택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아무리 노력해도 뗄 수 없는 고졸 꼬리표 현실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수영은 직군이 바뀐다고 해서 자신의 낮은 출발점이 플러스로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음수도, 양수도 없는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사랑의 이해>에 나오는 직장인들이 자주 이용할 법한 '블라인드'란 커뮤니티가 있다. 재직 중인 회사 외에 다른 정보는 '블라인드' 처리되는 커뮤니티다. 몇 년 전, '블라인드'에서 쿠팡의 개발자 채용 방법이 논란이 된 적 있다. 쿠팡이 학력을 보지 않고 실무 경력 위주로 채용하겠다는 발표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지방대가 코딩테스트 통과하면 어쩔 건데? 그게 공정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지방대, 고졸 출신은 '공정 논란'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비추어 보면, 은행을 퇴사하고 '내일의 행복' 카페를 차린 수영의 선택이 이해가 간다.
사랑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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