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영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영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팬데믹 속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탐정 '브누아 블랑(대니얼 크레이그). 어느 날, 억만장자 '마일스 브론(에드워드 노튼)'의 갑작스러운 초대를 받은 블랑은 마일스의 친구들과 함께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 '글래스 어니언'이 위치한 그리스의 한 섬으로 향한다. 마일스의 전 동업자인 '앤디 브랜드(자넬 모네)', 코네티컷 주지사 '클레어 디벨라(캐서린 한)', 과학자 '라이오넬 투생(레슬리 오덤 주니어)', 패션 스타 '버디 제이(케이트 허드슨)'과 유명 스트리머 '듀크 코디(데이브 바티스타)'까지. 블랑은 낯선 이들과 함께 마일스가 준비한 괴상한 살인 미스터리 추리극에 투입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글래스 어니언이 숨기고 있는 진짜 미스터리를 감지하고, 은폐된 살인극의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은 2019년 개봉 당시 클래식한 추리물의 쾌감을 선사하며 평단과 관객 모두의 호평을 끌어냈다. 이는 <나이브스 아웃>이 애거사 크리스티가 정립한 추리물의 정석을 착실히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일 강의 죽음> 같은 그녀의 추리물은 캐릭터의 개인사와 내면을 묘사하며 그들의 심리적 동기와 반응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쌓아 올린다. 그래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극은 사건 발생 이유와 경과를 추적하는 데에 중점을 둔 <셜록 홈즈>와는 결이 다르다. 누가 사건을 벌였는지 그 사연에 주목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모든 인물이 모인 자리에서 진상을 폭로하는 탐정은 내레이터, 더 나아가 스토리텔러의 역할까지도 맡는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도 전편처럼 정도를 착실히 걷는다.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가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것과 달리 블랑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점, 영화의 반 이상이 지난 후에야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 정도가 전편과 유의미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도 초반부는 사건에 관련된 캐릭터를 한 명씩 소개한다. 사업의 방향성을 두고 마일스와 관계가 틀어진 앤디, 마일스에게 정치자금을 후원받는 현 코네티컷 주지사 클레어, 마일스의 사업 비전에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 라이오넬, 마일스에게 투자받은 모델 출신 패션 디자이너 버디와 마일스에게 투자를 요구 중인 인플루언서 듀크까지. 그들이 마일스가 보낸 괴상한 퍼즐을 해결하고, 한자리에 모이는 과정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어떤 캐릭터이고 마일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그들의 관계가 곧 살인 미스터리의 복선이자 해결의 실마리로 기능할 예정임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가 다른 맥락에서도 애거사 크리스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고딕 로맨스와 슬래셔 장르를 더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스파이물과 연쇄 살인마 스릴러를 조합해 < ABC 살인사건 >을 써 내려간 바 있다. <나이브스 아웃>도 마찬가지다. 라이언 존슨은 추리물과 다른 장르를 결합해 자신만의 추리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브스 아웃>은 단순히 살인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추리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추리물의 탈을 쓴 채 사건을 둘러싼 캐릭터들에 주목한 블랙 코미디였다. 카메라는 미국 사회의 구성원을 상징하는 영화 속 각 캐릭터를 적나라하게 비췄다. 이민자 출신인 마르타를 배려하는 듯 보이는 트롬비 가문 사람들이 정작 마르타의 출신 국가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들은 마르타의 출신을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그저 중남미 국가 중 하나로 꼽는다. 그들에게는 외국인 노동자인 마르타의 국적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므로.
마르타를 도와주는 척 배신했던 '랜섬(크리스 에반스)'도 선조들의 집과 물려받은 권리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블랑은 애초에 랜섬의 할아버지가 파키스탄인 재벌로부터 구입한 집이 트롬비 가문의 저택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의 주장을 비웃는다. 이는 지난 몇 년 사이 미국에서 불거진 인종주의, 배타주의, 고립주의에 비수를 꽂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이민자 가문 출신인 마르타가 트롬비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고, 정작 트롬비 가족은 저택에서 쫓겨나는 결말로 쐐기를 박는다. <나이브스 아웃>은 미국 사회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비판하는 한 편의 풍자극이었던 셈이다.
미국 사회 폐쇄성 대신 자본을 겨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