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작은 '전설'의 시작
2022년 2월, 일본국제교류기금 주최로 < JFF 재팬 필름 페스티벌 2022 >가 열렸다. '랜선으로 떠나는 일본 여행'이라는 부제처럼 2주 동안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13편의 영화가 공개되었다. 코로나19 이후 오프라인 행사를 열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기존에 소규모 영화제와 상영회를 열던 단위들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특별한 화제작이나 최신작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하지만 아기자기한 라인업. 우리가 '일본영화'라면 흔히 떠올릴 법한 이미지다.
그중 1편의 영화가 유독 온라인 일부에서 화제에 올랐다. 2020년 일본에서 공개된 <썸머 필름을 타고!>라는 작품이다. 국내 수입도 되지 않았고 유명 감독이나 스타의 작품도 아니었다. 정보 자체가 생소했던 이 영화가 온라인 상영 후 간간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주로 취향에 맞는 영화를 찾아서 보는 속칭 '시네필'이라 불리는 이들과, 영화제작현장에 종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열렬히 본 작품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무슨 영화일까 호기심에 행사 막판에 상당수가 뒤늦게 막차 타듯 해당영화를 찾았다고 한다.
실은 그 소수의 인원에 필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든 생각. <썸머 필름을 타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쩔 뻔 했단 말인가.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나 보다. 물론 이 영화를 온라인으로 본 이는 지극히 적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천만 관객을 노리는 한국 상업영화 대작 홍보 파트너들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숫자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으로 보도자료 짜깁기한 후기와는 차원이 다른 진솔한 감상평이 여기저기 출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끔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겨울 끝자락에 풍문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 영화는 5개월 후 작품에 딱 맞는 계절, 여름 중턱에 개봉을 맞이한다.
2_대체 어떤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는 신인 감독이 10대 주인공들을 설정한 저예산 영화다. 한국으로 치면 딱 학생 독립영화에서 약간 업그레이드한 정도라 보면 맞겠다. 청춘영화를 (이와이 슌지의 영화세계 구분법 마냥) '블랙'과 '화이트' 계열로 나눈다면 이 영화는 전형적인 '화이트' 계열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연상될 그런 빤한 이야기는 아니다. 심각한 교육현실과 사회비판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을 미혹하고 적당히 넘어가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 독립영화에서 너무 자주 목격되어 이제는 좀 질리거나 식상한 극단적 표현에 이골이 난 이들에겐 청량감 그 자체라 할 만큼 여름 가뭄에 단비 같은 작품이다.
영화가 품은 정서는 (흔히 소년만화에서 발휘되는) '열혈'이라 해도 좋겠다. 주인공과 동료들은 입시에도 취업에도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 자신들의 여름방학을 통째로 바친다. '투자한다'라는 표현도 맞지 않다. 이들이 대가로 기대하는 건 없으니까.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다. 지쳐 쓰러질 지경인데도 뭐가 좋은지 씩 하고 실실거리며 웃을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이 영화 가득 펼쳐진다. 물론 실제 삶이 그렇게 순탄할 리 없다. 이들 또한 좌절과 대립, 반목과 충돌을 경험한다. 하지만 굳이 극적 긴장을 위해 제일 나쁜 경우를 과장하진 않는다.
만화 원작의 실사화 아니라면 이젠 일본영화에서도 드문 편인 이런 경향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이라면 20세기 말, 21세기 초의 몇 작품을 비교사례로 떠올릴 법하다. 이와이 슌지의 '화이트 이와이'로 분류되는 몇 편의 영화, 그리고 배두나가 주연해 국내에도 화제가 되었던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린다 린다 린다> 같은 일군의 흐름이다. <린다 린다 린다> 속 밴드 '푸른마음'이 기타와 스틱을 놓고 카메라와 붐을 든다면 곧바로 <썸머 필름을 타고!>의 맨발 일당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 가장 근접한 정서는 바로 <슬램덩크>의 세계다. 해당 만화를 알고 그 세계에 빠져본 이들이라면 단번에 직감이 올 테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걸 걸 수 있는 청춘의 순수함이 <썸머 필름을 타고!>에는 멸종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서 날뛰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십대에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이 뿜어져 나오는 바로 그 현장인 것이다.
시작은 전형적인 십대 청춘 학원물로 위장한 채 출발한다. '맨발'은 열혈 영화애호가다. 자기가 꿈꾸는 영화를 찍고 싶어서 영화동아리에 가입했지만, 매년 가을 학교축제를 겨냥해 제작지원을 받는 출품작 공모에서 번번이 미끄러진다. 선정된 작품은 내용만 들어도 닭살이 돋고 소름이 끼칠 지경인 로맨스 물이다. 고작 그런 뻔한 라이벌에 밀려났으니 영화광인 맨발은 의욕상실을 넘어 폭발 일보직전 상태다.
맨발은 의기소침한 나머지 그저 비밀 아지트에서 절친 '킥보드'(천문부), '블루하와이'(검도부) 셋이 함께 모여 남들은 안보는 시대극, 더 나아가면 '찬바라' 영화만 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는다. 친구들은 맨발을 위로하고 달래느라 고생이 막심하다. 그래도 주인공은 반드시 자신이 감동하던 무협물의 품위를 계승하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진 않는다.
어느 날 시대물 기획전이 열리는 작은 극장을 찾은 '맨발'은 보기 드문 자기 또래의 시대극 매니아 소년을 만난다. 하필 외모도 '맨발'의 시나리오 속 주인공과 찰떡궁합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낸 기분이다.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자기 영화에 배우로 출연해달라고 매달리지만 이 소년, '린타로'는 꼭 맨발이 영화를 만들 거라며 격려는 아끼지 않으면서도 출연은 한사코 거부한다. 맨발은 협박과 감금을 동원해 기어코 린타로를 캐스팅하고 동료를 모으기 시작한다. 자신의 반지원정대 혹은 7인의 사무라이를 결성하기 위해. 그렇게 영화 제작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