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구경이>의 한 장면
JTBC
배우 이영애의 이미지는 드라마 <대장금>의 지고지순함과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잔혹했던 모습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물론 나는 '금자씨'에 더 매력을 느낀다. 단아한 장금의 이미지를 단번에 박살낸 '금자씨'의 그로테스크함은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엔 불결하기 이를 데 없는 '구경이'로 변신했다.
JTBC 드라마 <구경이>에서 부스스하고 심드렁한 은둔형 게임광으로 등장한 이영애의 모습은 언뜻 어색해 보였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구경이'스러워지고 있었다. 여자 은둔형 게임광 설정은 한국 드라마에선 보기 드문데, 게다 여자 사이코패스 살인마 설정이 더해지면서 드라마는 매우 색다른 서사를 견인하고 있다. 시청률이 다소 아쉽지만 걸출한 두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괄목할 만하다. 지금껏 한국 드라마에서 이토록 독특한 여자 캐릭터들을 중심에 뒀던 적이 있던가.
이제껏 보지 못한 여성 탐정 구경이
유능한 경찰이었던 구경이(이영애)는 남편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며 불행해진다. 남편이 목숨을 끊은 이후, 경찰직을 이어갈 수 없었던 구경이는 스스로 자신을 집에 가뒀다. 과거와 단절되는 유일한 방법은 게임이었다. 그는 어느덧 식음을 전폐하고 게임에만 몰입하는 게임광이 되었다.
게임에 빠져 자신을 돌보지 않는 구경이의 집은 사람이 산다고 말하기 무색하게 벌레가 들끓는 아수라장이다. 목이 축 늘어진 남루한 티셔츠와 무릎이 나온 고무줄 바지에, 언제 감았는지 알 수 없는 쑥대머리를 하고는 종일 가상의 게임 세계에서 전투를 벌인다.
구경이가 이렇게 변한 데에는 아픈 이유가 있다. 남편이 다니던 학교의 한 제자가 시체로 발견되고, 남편이 그 제자와 부적절한 소문에 연루되자, 구경이는 남편을 취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의 결백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대신,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아내 구경이를 배신한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은 공정한 수사를 진행하던 구경이를 '남편 잡은 여자'로 만든다.
그동안 우리가 봐 왔던 많은 작품이라면, 경찰인 아내는 남편의 혐의를 무마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남편이 죄인이더라도, 세상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죄를 지었더라도 아내는 남편을 감싸고 헌신한다는 것이 유구한 가부장의 신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경이는 아내가 아니라, 오직 수사관으로서 남편을 취조한다. 이것이 비난받을 일일까.
그가 아무리 강직한 경찰이더라도, 철석같이 믿었을 남편을 의심하는 것은 뼈아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수사관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공정히 수행하려 했다. 남편이 돌연 죽음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을지 모르나, 세상은 구경이가 무리한 수사로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힐난했다.
어떤 강심장이라고 해도 배우자의 죽음에 태연할 수는 없다. '의심병'으로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난과 자책도 고통스럽지만, 무엇보다 그의 고통은 어쩌면 남편이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추론에서 비롯된다. 게다 살인사건의 피해자(죽은 제자)가 교사와 제자라는 권력관계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경우라면, '그 사람은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섣부르게 결론지을 수 없다는 것을 구경이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구경이 남편의 혐의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그의 결백 또한 밝혀지지 않았다. 제자를 죽게 한 사람은 누구인지, 남편과 제자가 부적절한 관계였는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성폭력의 여지는 있었는지, 모든 사건의 전말이 선명하지 않다. 이런 경우 보통의 아내는 남편의 밝혀지지 않은 혐의를 무죄로 간주한다. 명망 높은 남편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분명한 데도, 성폭력 따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하는 많은 아내들을 목도해온 우리에게 구경이의 모습은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남편이 파렴치한 범죄자더라도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내의 선택이고 권리일 수 있다. 그러나 버젓이 벌어진 범죄를 무화시키거나 피해자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 무도한 '부정(婦情)'보다는 공정한 부정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구경이의 몰락은 어쩌면, 가부장을 거부한 아내에게 내린 형벌일지 모른다. 피해자를 '꽃뱀'으로 만들어 남편을 구하는 대신, 막돼먹은 아내가 될지언정 부정의한 가부장의 수호자가 되지 않기로 한 구경이의 용기가 매우 값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이경, 다른 사이코패스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