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맬컴과 마리> 영화 포스터
<맬컴과 마리> 영화 포스터넷플릭스
 
지난 2월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맬컴과 마리>는 단출하다. 등장인물은 남녀 주인공 단 두 명이다. 영화의 배경은 집 안팎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흔한 회상 장면 하나 없이 하룻밤 동안 이루어지는 '맬컴(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마리(젠데이아 콜먼)'의 대화가 사건의 전부다. 그래서 영화감독인 맬컴과 배우 지망생이었던 마리 간에 말싸움과 화해, 또 다른 말싸움과 화해, 그것들이 반복될 뿐이다.

흔한 플래시백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 화면으로 장식되어서 화려한 영상을 즐기는 재미도 없다. 그러나 기교 없이 두 사람이 살아온 상이한 세계의 충돌을 진한 감정선에 담은 <맬컴과 마리>는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적인 영화다.

<맬컴과 마리>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영화를 세상에 선보인 맬컴은 평론가들의 호평과 관객들의 박수 세례에 매우 들뜬다. 반면에 마리는 무슨 이유에선가 기분이 좋지 않다. 축하주를 들자는 맬컴의 제안에, 평론가들의 평가와 대화를 들려주는 맬컴의 목소리에 그녀는 도통 집중하지 못한다. 맬컴은 마리의 태도에, 마리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는 맬컴의 모습에 화가 나면서 둘은 길고 긴 말다툼의 시작을 알린다.

사실 이러한 오프닝은 로맨스 영화에서 빠지기 어려운 클리셰다. 현실에서도 적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터라 보는 사람을 순식간에 홀리기는 하지만 흔한 로맨스, 멜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말싸움의 발단을 보여주는 방식은 이 작품이 한 커플의 갈등 그 이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둘은 분명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한 공간에 없다. 웬만해서는 컷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몇 분간 두 주인공은 방과 거실, 부엌과 거실, 거실과 테라스 등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 부엌과 거실을 좌우로 오가는 카메라 사이에는 창문틀과 같이 세로로 그어진 선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서로의 거리, 음악과 같은 방해물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제대로 된 대화도 되지 않는다. 이후 반복되는 듯 조금씩 달라지는 둘의 대화는 왜 둘 사이가 분리되어야 했는지, 그리고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하나씩 짚어 나간다.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서 언쟁을 벌이는 두 사람

둘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서 언쟁을 벌인다. 맥 앤 치즈를 먹을지 말지로 시작된 둘의 대화는 이내 맬컴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평단의 평가 내용에 대한 의견 교환으로 이어진다. 맬컴이 자신을 감사 소감에서 빼놓은 것에 대한 마리의 불만,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 과거에 만났던 이성과 그들의 과거사가 그 뒤를 따른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둘러싼 말다툼이다. 구체적으로는 영화에 대한 의견의 충돌, 이 언쟁의 내용이 작품에 부여하는 통일성이 흥미롭다. 맬컴은 자신의 영화를 두고 흑인 여성이 미국의 의료제도 내에서 감내해야 하는 젠더 폭력을 다루는 진정한 걸작이라고 평가한 비평가를 신랄하게 욕한다. 그는 영화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고, 단지 "마음과 찌릿함"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화낸다. 영화가 한 인물을 어떤 미스터리 안에 녹여내는지 그 아이디어와 기교가 정치적의 의도에 앞서야 한다면서.

그러자 마리는 맬컴에게 말한다. 너에게는 그 마음에 있어야 할 진정성이 없다고. 너도 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 나의 아픈 기억과 추악함을 아름답게 바꿔 놓으면서 내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기회를, 내 진정성을 드러낼 기회를 없앴다고. 영화가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열을 내는 맬컴에게 그조차도 그 사실을 상쇄하려고 유식한 척하는 거라고 일갈한다. 영화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예술 형태인 이상 그도 이미 정치적 의도와 메시지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순을 일깨운다. 배우 지망생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그가 대학을 나오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영화감독이라는 점에서 인종 문제와 별개로 사회적 기득권이라는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이때 영화를 둘러싼 갈등을 창문 삼아 둘의 말다툼을 다시 들여다보면, 맬컴과 마리의 대화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체성의 대립이자, 그것들의 단면을 조각조각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 평론가의 비평에서 시작되어 다시 그 비평으로 되돌아오는 그들의 언쟁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의 장이기 때문이다. 둘은 흑인이라는 정체성 안에 묶여 있지만 남녀, 대학 경험의 유무, 기득권과 비기득권, 영화감독과 배우 지망생 등 다양한 정체성의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문제에 대해서 결코 같은 관점에서 대화할 수 없다. 맬컴이 마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거나 그녀를 캐스팅하지 않은 일도 각자에게 전해지는 무게감은 천지차이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진정성, 맬컴과 마리의 외양으로 드러난 진정성은 일원화할 수 없는 수많은 정체성의 차이인 것이다.
 
 넷플릭스 <맬컴과 마리> 스틸 컷
넷플릭스 <맬컴과 마리> 스틸 컷넷플릭스
 
영화는 이러한 정체성들의 충돌, 한 개인의 인생과 또 다른 개인의 인생이 총체적으로 충돌하는 과정을 맬컴의 말마따나 실로 영화적으로, 멋진 아이디어와 기교로 담아낸다. 우선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는 인종문제에 감춰지기 쉬운 수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보다 명백하고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세상이 전부 흑백인 세계에서 배우들의 피부색보다는 배우들의 입으로 전달되는 내용 그 자체에 더 주목이 간다.

스크립트를 쓰는 맬컴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와중에도 하나하나 말로 설명하는 것에 비해 마리가 잠깐의 소극을 보여주며 맬컴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해시키는 방식 역시 그 자체로 영화적이다.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심금을 울리는 대사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배우의 연기력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두 주인공 사이에 오가는 대사, 표정, 제스처 안에 녹여내는 것 역시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가장 진정성 있게 풀어놓는 방식으로 보인다. 그 결과 미니멀한 연출을 만난 젠데이아 콜먼과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연기력은 더욱 빛난다.

2시간에 걸친 격렬한 언쟁은 맬컴과 마리가 거듭 싸우는 와중에도 거듭 키스와 스킨십을 서로에게 퍼부은 것처럼 화해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서로를 잡아먹을 것 같던 상처 주는 말들의 형언으로 가득하던 영화의 결말은 아무런 대사 없이 조용하다. 화해하는 모습을 원경에서 뒷모습만 잡을 뿐이다. 어째서일까.

서로가 감추어 두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후련히 털어냈기 때문은 아닐까. 비로소 서로의 세계와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의 대화, 폭언, 언쟁, 고함이 없어도 진정으로 서로에게 감사함을, 존중을,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마치 영화가 온전히 맬컴과 마리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영리하고 신선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동시에 가감 없이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을 모두 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기에 이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두 사람의 충돌을 진정성 안에 써 내려가는 <맬컴과 마리>는 실로 영화적인 영화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와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맬컴과 마리 넷플릭스 존 데이비드 워싱턴 젠데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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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종교학 및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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