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택-여인들의 전쟁>.
TV조선
19세기 전기·중기를 조선을 지배한 세도가들은 선비 가문인 동시에 지주 가문이었다. 농업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는 지금의 기업체 대주주 가문과 같았다. 그들의 경제력은 중소기업이나 웬만한 대기업을 뛰어넘었다. 오늘날의 재벌에 비견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세도가문들은 왕실 사돈(외척)이란 지위를 이용해 전국 각지에 부동산을 보유했다. 전국 곳곳에서 이렇게 했다는 것은 지방 각지에 소작농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토지를 매개로 전국 농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오늘날 골목상권까지 장악한 재벌의 위세에 비견될 만한 세도가문들의 위세가 전국 곳곳의 논밭에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충북 충주지역에 대한 세도가문들의 토지 보유 실태를 분석한 남금자 충주시 학예연구사의 논문 '대한제국기 홍순형의 가계와 충주 지역 토지 소유'에서 그 같은 세도가문들의 위력을 엿볼 수 있다. 2016년에 <민족문화연구> 제73호에 실린 이 논문은 대한제국 시대의 충주군 토지대장인 <충주군 양안>을 근거로 이 지역 지주들의 실체를 추적한다.
이 논문은 "대한제국기의 <충주군 양안>에서 확인되는 대지주에는 외척 가문의 세도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면서 "19세기의 대표적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들이다"라고 소개한다.
이 논문의 주인공인 홍순형은 순조의 손주며느리이자 헌종의 두 번째 왕비인 효정왕후의 친정 조카다. 효정왕후의 친정인 남양 홍씨는 순조·헌종·철종 시기에는 큰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가문은 정조 임금 초기에 홍국영이 권세를 부릴 때 잠간 빛을 봤었다. 이때는 세도정치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이었다.
헌종은 효정왕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첫날부터 각방을 썼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이처럼 효정왕후는 헌종의 마음을 얻지 못했지만, 그의 친정은 외척이란 지위를 이용해 부동산 보유를 늘려갔다. 이들은 남한강을 통해 한양과 연결되는 충주의 경제적 가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위 논문은 홍순형이 "충주에서 3번째로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고 말한다.
이 시대에 남양 홍씨는 세도가문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왕실 외척이란 지위를 이용해 많은 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외척이자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는 남양 홍씨보다 더 많은 토지를 보유했다. 홍순형이 3위로 밀린 것은 그 때문이다.
세도가문들의 부동산 매입은 충주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위상은 오늘날의 웬만한 대기업 이상이었다. 재벌이라고 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재벌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해도, 직접 가담하지는 않는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도 삼성물산 사장이던 1960년대 초반에 정치에 뛰어들 생각을 했지만 단념했다.
그는 1986년 출판된 <호암자전>이란 자서전에서 "나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 생각한 적이 있다"면서 자신이 부정축재자로 지탄받는 현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1년여를 숙려한 끝에 정치가로 가는 길은 단념했다"고 말했다.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 대신,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자 그가 1965년에 벌인 일이 중앙일보 창간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은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뒤 12월 대선에 출마했지만, 이듬해 2월 의원직을 사퇴한 뒤 정계를 떠났다. 그의 생애에서 정치인 생활은 1년간의 '짧은 외출'이었다.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두 재벌 창업자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의 재벌은 정치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는다. 정주영의 6남인 정몽준이 국회의원을 7번 역임하고 한나라당 대표도 지냈지만, 이는 재벌 가문 구성원의 개인적 행위였을 뿐이다. 재벌 가문이 집단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재벌이 정치에 직접 가담하지 않는데도 재벌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이 경제 영역에서 산출하는 부정적 영향이 그만큼 심대하다. 그들이 집단적으로 정치에까지 뛰어든다면 한국 사회는 일대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도가문들은 경제력은 물론이고 정치권력까지 장악했다. 가문 구성원들이 조정으로 대거 진출해 하나의 집권당을 구성했다. 지금의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어전회의는 세도가문들의 가족회의를 방불케 했다. 사회 전체가 아닌 가문의 이익만 추구하는 집단이 정계와 재계를 장악했으니, 이 시대의 부조리는 매우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