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첫 방송된 TV조선 사극 <간택-여인들의 전쟁>은 첫 장면부터 이목을 끌어당긴다. 혼례식을 마치고 신부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던 임금 이경(김민규 분)이 노상에서 총격 테러를 당한다. 머리에 총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하는 일이 일어난다. 새신부인 왕비 강은기(진세연 분)도 마찬가지다. 그러더니 왕비는 그대로 죽지만, 임금은 국상 중에 되살아나는 기적이 벌어진다. 매우 인상적인 장면들로 제1회가 장식된 것이다.
앞으로 이 드라마는 강은기의 쌍둥이 동생인 강은보(진세연 분)가 범인을 찾기 위해 왕비 자리에 도전하는 쪽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고돼 있다. 배우 진세연이 죽은 언니와 살아 있는 동생을 둘 다 연기하는 것이다.
왕이 노상에서 총격 테러를 당하는 첫 장면이 인상적인 데다가 머리에 총 맞은 임금이 며칠 만에 부활하니, 이 드라마가 실제 역사와 무관한 완전한 픽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 전체가 완전한 허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물론 총을 맞은 왕이 부활하는 판타지같은 일은 역사에 없었지만 실제 사실에 착안하고 여기에 꽤 많은 가공을 입힌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에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같은 세도가문(집권 가문)들이 등장한다. 이 두 가문과 경주 김씨에 의해 전개된 세도정치 시대가 드라마의 배경인 것이다. 세도정치는 정조가 죽은 1800년부터 고종이 즉위한 1864년까지 이어졌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이 시대 사람들인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나 백과사전에는 고종이 1863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이 날은 음력으로 계해년 12월 13일, 양력으로 1864년 1월 21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날짜가 양력이 아닌 음력이라는 점에 주의하지 않다 보니, 12월 13일을 양력으로 착각해서 '1863년 12월 13일에 고종이 즉위했다'고들 쓰게 된다. 12월 13일은 음력이므로 이를 양력으로 변환하게 되면 1864년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고종이 즉위한 해는 1863년이 아니라 1864년이다.
1800~1864년에 활약한 세도가문들이 등장한다는 점에 더해, 며리계(旀里界)라는 국명이 등장한다는 점도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을 가늠케 하는 자료다. 제1회 방송이 6분을 경과한 시점에서 등장하는 이 국명은 1800년대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가리키는 표현 중 하나였다.
'아메리카'에서 '아'가 약하게 들리다 보니, 동아시아인들은 '메리카' 부분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며리계'란 한자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은 이 글자를 '메이리제'로 발음했다.
또 이 드라마에는, 왕이 죽었다고 생각한 신하들이 허름한 농가에 가서 어수룩해 보이는 왕족을 새로운 왕으로 모셔오는 장면이 나온다. 헌종(재위 1834~1849년)이 죽은 뒤에 철종이 옹립되는 과정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이는 드라마 작가가 헌종 시대를 염두에 두고 스토리를 상상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들에 더해,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노상 테러를 당하기 전에 임금이 보인 행동이 헌종 임금을 꼭 빼닮았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의 헌종은 왕비 후보 심사장에 나타나는 파격을 연출했다. 조선시대에 이 문제로 인해 두고두고 거론된 임금은 바로 헌종이었다.
게다가 헌종은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한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를 남겼다. 드라마 속 임금이 첫사랑과 결혼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과 많이 닮았던 것이다.
헌종의 이름은 이환이고 드라마 속 임금의 이름은 이경이라서 형식상으로는 헌종에 관한 드라마가 아니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보나 임금의 특징으로 보나 이 드라마는 헌종을 떠올리게 할 만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의 헌종은 드라마 속 임금처럼 사랑 때문에 총격 테러까지는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실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한 편의 사랑 이야기를 남겼다. 1970년대까지 생존한 대한제국 궁녀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1987년에 발행된 역사학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그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종황제 때 궁녀들이 전해들은 이야기 속에 헌종의 사랑에 관한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실린 궁녀들의 진술에 따르면, 헌종이 왕이 된 지 10년 뒤인 1844년 왕실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 왕후를 잃은 지 1년 뒤인 열일곱 살의 헌종이 두 번째 왕후를 뽑는 간택 현장에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간택-여인들의 전쟁>에도 나온 이 장면은 왕실의 전례를 깨는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왕비 후보자의 심사는 주로 왕실 여성들의 몫이었다. 왕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신붓감을 골랐다. 그래서 임금 본인은 왕비를 선택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심사장에 나갈 수도 없었다. 1834년에 일곱 살 나이로 왕이 된 헌종의 첫 번째 결혼 때까지도 이 원칙은 잘 지켜졌다. 그랬던 것이 1844년에 깨지게 것이다.
결국 헌종은 삼간택이라 불리는 최종 심사에 참석했다. 임금의 권위를 앞세워 끝끝내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참석만 한 게 아니었다. 드라마에서처럼 자기가 직접 신부를 선택하려고까지 했다.
어렵사리 심사장에 나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헌종이 신부를 직접 선택하려고까지 한 것은 후보 중 하나한테 시선이 확 끌렸기 때문이다. 헌종보다 네 살 적은 김씨 소녀가 그 주인공이었다. 열일곱 살 소년의 심장을 쿵쿵 뛰게 할 정도의 매력을 보유한 소녀였던 듯하다.
하지만, 헌종과 김씨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헌종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김씨 대신 홍씨를 택했기 때문이다. 효정왕후 홍씨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 최종 간택됐던 것이다.
왕실과 조정은 왕이 여성에게 푹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당시 각광 받는 미모는 왕후로 뽑히기 어려웠다.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씨는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탈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헌종의 사랑은 그렇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헌종과 효정왕후의 신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첫날밤부터 각방을 썼을 정도다. 이렇게 냉랭했으니, 아이가 생길 리도 만무했다. 문제의 원인은 김씨였다. 헌종이 김씨와의 짧은 마주침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3년 뒤인 1847년, 스무 살이 된 헌종은 행동에 나섰다. 김씨를 첩으로라도 들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효정왕후의 불임을 핑계로 댔다. 후계자가 없으면 양자라도 들이는 서유럽 군주들과 달리 한국·중국 군주들은 어떻게든 친자에게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니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후궁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헌종은 이 제도를 활용해 그해 늦가을에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헌종의 열렬함이 그렇게나마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후궁이 된 김씨는 김경빈(경빈 김씨)으로 불렸다. 공식 지위는 후궁이지만, 사실상 왕비나 다름없었다. 그는 왕비 선발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 후궁으로 뽑혔다. 게다가, 단번에 1등급 후궁인 빈(嬪)에 올랐다. 무엇보다 헌종의 확고한 애정이 그의 지위를 반석처럼 만들어주었다.
김경빈에 대한 헌종의 애정을 증거하는 건축물이 서울 시내에 남아 있다. 창덕궁 낙선재가 바로 그것이다. 낙선재는 헌종이 김경빈에게 선물한 집이다. 외형상으로는 여타 건물에 비해 수수한 편이다. 궁궐 건물이 아니라 일반 기와집이란 느낌을 준다. 후궁에게 지어주는 건물인지라 화려하게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김경빈에 대한 헌종의 마음이 간직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