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
위키커먼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아명은 수선(水仙)이었다. 아명도 물과 관련이 있었다. 집안은 서민 가정이었다. 서민 출신치고는 학교를 많이 다녔다.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그 뒤 소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일본 우에노음악학교 성악과에 진학했다.
윤심덕은 전통적 여인과는 달랐다. 마음 끌리는 대로 살았다. 부끄러움도 없었다. 수줍어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경멸했다. 노는 것도 달랐다. 예술의전당 이사장이었던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의 <비운의 선구자 윤심덕과 김우진>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녀는 겁이 없고 모험심이 강했다. 그래서 사내아이들과 바다에 뛰어들기도 잘 했다. 하루는 그녀가 하루 종일 없어져서 야단법석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어부를 졸라서 온종일 바다에 나갔다가 밤에서야 돌아온 게 아닌가."윤심덕은 그 시대 여성들이 흔히 갖고 있었던, 남자에 대한 존경심도 없었다. 아버지뻘 되는 남자들한테도 존댓말인지 반말인지 헷갈리는 말을 썼다.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예의 없는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움을 사지는 않았다. 언제나 인기 최고였다. 예의를 차리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끄는 묘한 인물이었다.
윤심덕은 남자한테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전통적 여인과 달랐다. 그는 키가 크고 인상이 서글서글했다. 성격도 화통했다. 남자들한테도 친구처럼 대했다. 그래서 남자들이 늘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남자를 깊이 사귀지는 않았다.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윤심덕 때문에 상사병을 앓는 사람도 많았다. 그것이 정신병으로 이어져 총독부병원(지금의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은 남자도 있었다. 이렇게 남자들이 매달렸지만, 그는 남자한테 인생을 걸지 않았다.
윤심덕의 꿈은 세계적 성악가였다. 그에게는 자기 인생이 더 중요했다. 구시대 여성들은 남편의 성공을 자기의 성공으로 인식했지만, 윤심덕은 여자 인생은 여자 자신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민 가정이란 제약에 굴하지 않고 미국인 의사(여성)의 후원도 받고 본인도 돈을 버는 방법으로 학교 공부를 했던 것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게 27세 때인 1923년이다. 그는 이미 그 전부터 유명했다. 일본 유학 중에 한국 25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한 적이 있었다. 관객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는 성악가가 귀했다. 그래서 그의 클래식 노래, 그의 인간됨됨이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태에서 27세 때 귀국해 본격적 성악가의 길을 걸었다.
지금도 성악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윤심덕은 그 시대에 성악으로 인기를 끌었다. 공항 패션이란 말이 있다. 윤심덕의 경우는 공항 패션이 아니라 전차 패션이었다.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전차를 탔느냐까지 보도될 정도였다. 인기 최고였던 것이다. <신여성> 1926년 2월호에 이런 기사가 있다.
"윤심덕 아씨는 …… 일전에 누가 전차 안에서 보니까, 검은담비 두루마기에 금테안경을 쓰고 두 손에는 보석 달린 금반지가 번쩍번쩍하는데." 세상은 윤심덕이 돈 방석에 앉은 줄 알았다. 가족들도 그랬다. 방송이나 음반으로는 돈을 좀 벌었지만, 음악 콘서트 출연은 거의 무료였다. 방송이나 음반보다는 콘서트를 위주로 했으니, 실제 수입은 얼마 안 됐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가족들은 윤심덕만 믿고 평양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윤심덕은 가족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남동생이 누나만 믿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윤심덕의 고민은 깊어갔다. 윤심덕을 밀착 취재하던 기자가 이 사실을 알아내 신문에 실었다. 그러자 수많은 남자 독지가들이 후원을 자청했다. 고민 끝에 윤심덕은 그중 한 사람의 돈을 받기로 결심했다. 서울 갑부 이용문의 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후원금을 받으러 그 집 문턱을 넘은 게 엉뚱한 방향으로 보도됐다. 윤심덕의 몸과 이용문의 돈이 거래된 것처럼 기사화된 것이다. 그러자 비난 기사가 봇물을 이뤘다. 그는 하루아침에 탕녀로 전락했다. 가는 데마다 손가락질이었다. 성악가 윤심덕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귀국 2년 만인 29세 때였다.
하루아침에 탕녀로하루아침에 추락한 윤심덕은 만주에서 잠시 요양을 했다. 그런 뒤 국내로 돌아와 연극배우로 변신했다. 당시엔 여배우가 기생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 성악가는 존경받았지만, 여배우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윤심덕은 여배우로 이미지 변신을 하고자 했다. 애인 김우진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김우진은 극작가에다가 목포 갑부의 아들이었다. 아호는 수산(水山)이었다. 그에게도 물 水가 들어갔던 것이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도쿄 유학 중에 만났다. 둘은 동갑이었다. 김우진은 조용한 샌님이었다. 활달한 윤심덕은 그런 김우진이 좋았다.
윤심덕은 다른 남자들은 다 무시해도, 김우진만큼은 아버지나 스승처럼 대했다. 김우진이 기혼자였지만, 윤심덕의 눈에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남자일 뿐이었다. 바로 그 김우진이 배우의 길을 권유했다.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주려 했던 것이다.
윤심덕이 연극배우가 됐다는 소식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데뷔 무대에는 관객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하지만, 연기가 수준 이하였다. 연기 기본이 안 된 상태에서 대사만 외워 출연했던 것이다. 급조된 배우였던 것이다. 성악 투로 대사를 암기했다. 혹평은 당연했다.
윤심덕을 고용한 극단 토월회는 그를 상업적으로만 이용했다. 윤심덕의 연기력에는 신경을 써주지 않고, 그 명성을 이용해 관객을 끄는 데만 신경을 썼다. 그렇게 소모품으로 전락한 윤심덕은 한 달 만에 배우를 포기했다. 극단은 한 달간 큰돈을 벌었지만, 윤심덕은 재기불능에 빠졌다. 관객이 많이 모였기에 극단은 돈을 벌었지만, 그 많은 관객이 주연배우를 흉보고 돌아갔기에 윤심덕은 재기불능이 되고 말았다.
윤심덕이 할 수 있는 일은 라디오 출연과 음반 취입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김우진이 일본으로 떠났다. 김우진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진보적이고 서구적 지식인이라, 1920년대 한국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유학을 결심하고, 일단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윤심덕도 일본으로 향했다. 세 가지 이유로. 첫째, 미국행 배를 타고자 일본으로 가는 여동생을 배웅할 목적이었다. 둘째, 김우진을 만날 목적이었다. 셋째, 이토 레코드사에 가서 음반을 낼 목적이었다.
이때 준비해간 노래가 바로 '사의 찬미'다. 애초에 이토 레코드사와 계약한 26곡에는 '사의 찬미'가 없었다. 그런데 녹음이 끝난 뒤에 윤심덕이 갑자기 제안을 했다. '사의 찬미'도 녹음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