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재개봉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역작 <플래툰>.
30년 만에 재개봉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역작 <플래툰>.(주)시네마천국

베트남 전쟁은 미국으로선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다. 전쟁의 기원은 프랑스 식민세력에 맞선 베트남 민중들의 투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 민중들은 디엔 비 엔푸 전투의 대승리를 통해 프랑스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미국은 베트남의 사회 혼란을 빌미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전면전쟁을 일으켰다. 당시는 미소 냉전이 첨예했던 시절이었고, 이런 가운데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했다.

미국은 1975년 철수할 때까지 엄청난 물량 공세를 펼쳤다. 그런데도 미국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유의 횃불을 치켜든 민주진영의 방패'라는 미국의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오히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의 허위와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올리버 스톤은 1986년 <플래툰>을 통해 이 같은 미국의 민낯을 고발했다. 최근 <반지의 제왕> <사운드 오브 뮤직> <미션> 등 고전 영화 재개봉 바람을 타고 이 작품 역시 지난 15일 재개봉 상영을 시작했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적이 지난 1987년 국도극장에서였으니 꼭 30년 만의 재회다.

타이틀 롤 크리스 테일러 역의 찰리 신은 지금 봐도 풋풋하고, 엘라이어스 상사로 분한 톰 베린저의 연기는 여전히 섬뜩하다. 반즈 상사가 두 손을 하늘 높이 추어올리며 최후를 맞는 장면은 또다시 보아도 진한 여운이 남는다. 이 장면은 종군기자 아트 그린스폰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에서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흐느끼듯 울려 퍼지는데, 이 곡의 애처로운 곡조는 전쟁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곡 같이 들린다.

30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진보'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에 이런 문제를 제기해 보고 싶다.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진보하는가?

올리버 스톤, '진보'란 화두를 던지다

 <플래툰>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엘라이어스 상사, 크리스 일병, 반즈 상사.
<플래툰>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엘라이어스 상사, 크리스 일병, 반즈 상사.(주)시네마천국

이 작품은 개봉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베트남전을 다룬 어떤 영화보다도 더 진지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는 의 찬사를 받았다.

실제 올리버 스톤 감독의 통찰은 심오했다. 무엇보다 소대(플래툰) 주임상사 반즈와 엘라이어스의 대립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사람은 작전 중에 사사건건 대립한다. 소대원들도 덩달아 반즈 편과 엘라이어스 편으로 갈려 서로에게 증오를 퍼붓는다. 주인공 크리스는 이 상황을 '소대 내 시민전쟁'이라며 어이없어한다. 반즈와 엘라이어스의 대립은 둘이 속한 소대가 베트콩이 은신해있다고 여겨지는 어느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을 점령했을 때 절정에 다다른다.

병사들은 마을에서 동료 미군 병사 한 명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광경을 목격한다. 반즈는 치를 떨며 분노를 폭발시킨다. 소대원들의 광기도 극에 달한다.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폭행, 살해하는가 하면 어린 소녀를 집단 강간한다. 이러자 엘라이어스는 반즈를 제지하려 하고, 이어 두 사람은 난투극을 벌인다. 작품 속 미군의 모습은 자신들끼리 편을 갈라 싸움을 일삼고, 평화롭던 베트남의 조그만 마을 사람들의 삶을 유린하는 침략자의 모습에 불과하다. 올리버 스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애초 미국이 베트남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거창한 전쟁 명분과는 달리 자기 자신도 구원 못 하는 침략자임을 고발한다.

올리버 스톤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 크리스 테일러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젊은이이다. 그는 다니던 대학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자진해서 베트남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의 흑인 동료는 비아냥 조로 그를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이름 없는 마을 출신들이었으며 또한 하나같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전쟁에 '끌려왔다'. 크리스는 이들을 보면서 '왜 밑바닥 젊은이들이 고통을 짊어져야 하나?'하고 자문한다. 또 그의 순수한 신념이 무색하게 전쟁은 매일 반복되는 참호 구축 작업, 매복과 야간 정찰, 그리고 전역 날짜만 손꼽아보면서 오로지 생존만 목표로 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이러자 크리스는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베트남에 온 걸 후회한다고 적는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후에도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세계 도처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쟁 양상은 베트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3년 미국이 감행한 이라크전이 그랬다. 부시 미 행정부는 처음엔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WMD)를 문제 삼더니, WMD의 존재를 입증할 자신이 없어지자 슬그머니 이라크의 민주화로 말을 바꿨다. 그리고 이라크전에 투입된 병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용직을 맴돌던 젊은이들이었다.
이 지점에서 앞선 문제를 다시금 제기해 보고자 한다.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진보하는가?

베트남의 교훈 역이용한 미 군부

 엘라이어스 상사가 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 들며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엘라이어스 상사가 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 들며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주)시네마천국

다시 한번 이라크전을 떠올려보자.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반전 여론이 들끓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조차 동료의 죽음을 폄하하는 지경이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의 교훈을 효과적으로 역이용했다. 즉 언론 조작을 통해 군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애국심 마케팅으로 반전 여론이 생길 여지 자체를 차단한 것이다. 미국이 세계 도처에 운용 중인 군사기지의 실태를 고발한 찰머스 존슨은 자신의 저서 <제국의 슬픔>에서 이같이 적었다.

"2003년 봄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면서 펜타곤(미 국방성-기자 주)은 끝없는 캠페인에 새로운 계략을 짜내 대중들이 무엇을 알게 되는지 통제하고 군을 호의적으로 그려내도록 했다. 펜타곤의 결정 내용은 약 600명의 남녀 기자, 사진 기자, TV 요원들을 전투부대에 '박아 넣어서(embed)' 이들이 군 병력과 줄곧 동행하며, 손쉽게 승리한 전쟁이 어떤지를 알게 하자는 것이었다. (중략) 펜타곤의 수칙에 따르면, 지휘관의 허락 없이 교전 중인 상황을 보도한다든지 군사 임무의 날짜, 시간, 장소,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금지됐다. 1차 걸프전에서 군 당국은 기자단 시스템에 의존했다. 2차 전쟁에서는 군 당국이 원하지 않는 것은 보도가 안 될 것이며, 미국의 새로운 무균 전쟁을 전국의 안방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신병 모집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처럼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보인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기자가 던진 문제의식, 즉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진보하는가?'란 의문에 답은 '아니오'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은 다시금 진보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영화의 재개봉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은 이 지구의 어느 곳에서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라는 위험천만한 전쟁 도구를 들여놓아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에 찬바람을 몰고 왔다. 이 모든 점을 감안해 볼 때,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의식의 진보 혹은 민주적 가치의 증진을 담보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보다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개입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성취된다고 할 것이다.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자연적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인간이 의식적으로 관련되고 또한 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특수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역사가 시작된다." -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주 한인매체 <뉴스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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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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