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즌 kt 위즈의 약점은 단연 1루수였다. 김상현으로 시작했던 kt의 1루 자리는 김연훈과 유민상을 거쳐 시즌 막판엔 루키 남태혁에게까지 돌아갔다. 하지만 어떤 선수도 조범현 전 감독과 kt 팬들이 바라던 강력한 1루수가 되지 못했다. 이에 kt는 작년 시즌이 끝난 후 고 앤디 마르테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1루수 자원 조니 모넬을 영입했다(미국에서 모넬의 주포지션은 포수였지만 kt에선 1루수로 활약할 예정이다).

1루 문제가 해결되니 이제는 마르테가 책임지던 3루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황재균(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영입에 실패하고 기대주 문상철마저 상무에 입대하면서 kt의 핫코너는 사실상 무주공산이 됐다. 김진욱 신임 감독은 유격수 요원이었던 심우준과 상무에서 전역한 정현, 그리고 박용근, 김연훈 등 기존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들을 경쟁시키겠다고 밝혔다. 심지어 외야수 요원 김사연까지 3루수 경쟁 구도에 합류했다.

3루수 주전 경쟁을 벌일 선수들 중 심우준은 작년 유격수로 92경기에 출전해 510이닝을 책임졌던 선수다. 미래의 주전 유격수로 키우던 심우준이 3루수로 변신을 하면 유격수 수비가 무너질 위험이 생긴다. 하지만 김진욱 감독과 김용국 수비코치는 유격수 포지션에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유격수 자리에는 프로 18년 차의 든든한 베테랑 박기혁이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골든글러브 이후 6년 간 부진의 연속

 신생팀 특혜가 없었다면 박기혁의 FA 이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생팀 특혜가 없었다면 박기혁의 FA 이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kt 위즈

대구상고(현 상원고) 시절부터 뛰어난 순발력과 강한 어깨를 갖춘 대형 유격수 재목으로 이름을 날리던 박기혁은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2라운드(전체15순위)로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됐다. 대부분의 신인들이 그렇듯 박기혁도 입단 초기에는 2군을 전전하다가 2002년 롯데의 주전 유격수 김민재가 SK 와이번스로 이적하면서 출전 기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1군 무대는 만만치 않았다. 박기혁은 탁월한 수비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시즌 내내 유지할 수 있는 안정감은 미처 갖추지 못했다. 2003년에는 5경기 연속 실책, 2005년에는 시즌 19실책을 저지르며 여물지 못한 기량을 보여주더니 2006년에는 무려 .989의 수비율로 8개 구단 유격수 가운데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등 기복이 심했다.

박기혁이 전성기를 보낸 시즌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2008년이었다. 그 해 이원석(삼성 라이온즈)과의 주전 경쟁에서 승리한 박기혁은 113경기에 출전해 타율 .291 102안타1홈런36타점16도루를 기록하며 롯데의 가을야구 진출에 큰 공을 세우며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했다. 이듬 해 열린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는 부상으로 결장한 박진만 대신 주전 유격수로 나서며 미국 현지 해설진을 놀라게 한 호수비를 여러 차례 선보이기도 했다.

WBC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탓일까. 박기혁은 2009 시즌 타율 .216로 성적이 추락했고 2010년엔 복사뼈 골절 부상까지 당하며 22경기 출전에 그쳤다. 내심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승선을 노렸던 박기혁이었기에 아쉬움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2010 시즌이 끝나고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킨 박기혁은 공익근무 요원으로 입대하며 병역의무를 마쳤다.

2013년 소집해제된 박기혁은 팀으로 복귀했지만 롯데엔 이미 주전 문규현과 백업 신본기가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박기혁은 복귀 후 2년 동안 1군에서 53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2014 시즌이 끝난 후 미뤄둔 FA를 신청했다. 2008년 반짝 좋은 성적을 낸 후 6년 동안 헤매고 있는 유격수가 FA 시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롯데와의 우선협상 기간이 종료된 지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아 신생구단 kt에서 박기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2할대 후반의 타율과 안정된 수비 겸비한 듬직한 내야의 맏형

 박기혁은 화려하진 않아도 언제나 제 몫을 다 하는 kt의 주전 유격수다.
박기혁은 화려하진 않아도 언제나 제 몫을 다 하는 kt의 주전 유격수다.kt 위즈

박기혁은 kt와 3+1년에 최대 11억5000만원의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kt가 신생팀 혜택으로 보상 선수를 내줄 필요가 없었기에 가능한 영입이었다. kt팬들은 박기혁의 영입을 썩 반기지 않았다. 박기혁은 누가 봐도 정점에서 내려오고 있는 30대 중반의 한물간 유격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기혁은 자신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실력으로 뒤집는데 성공했다.

박기혁은 2015년 4월 한 달 동안 타율 .121에 그치며 온갖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6월과 7월 타격 성적을 부쩍 끌어 올리더니 126경기에서 타율 .280 84안타1홈런30타점으로 이적 후 첫 시즌을 마감했다. 비록 규정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 수비 부담이 큰 유격수, 그리고 기회가 자주 걸리지 않는 9번 타자의 성적으로는 매우 준수했다.

박기혁은 작년 시즌에도 타율 .273 84안타2홈런34타점을 기록했다. 2015년과 비교해 큰 변화가 없는 활약을 펼치며 kt의 박기혁 영입이 대단히 경제적인 선택이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특히 유격수로서 105경기에서 726이닝을 소화하며 .973라는 대단히 안정적인 수비율을 과시했다. 2016년 700이닝을 넘게 소화한 유격수 중 박기혁보다 수비율이 좋은 선수는 김재호(두산 베어스, .984)와 문규현(롯데, .984), 그리고 손시헌(NC 다이노스, .975)뿐이다.

박기혁은 올해로 kt와 계약 3년째를 맞는다. 구단이 박기혁과 맺은 +1년의 옵션을 행사해 2018년까지 고용안정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2017년에도 변함없는 활약이 필요하다. 특히 올해는 백업 유격수 심우준이 3루 경쟁에 합류하기 때문에 kt의 1군급 선수 중에서 전문 유격수 요원은 박기혁 하나 밖에 남지 않는다. 그만큼 이번 시즌 kt 내야에서 박기혁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박기혁은 롯데 시절부터 호리호리한 체격에 가녀린 외모, 그리고 넓은 수비 범위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플레이로 많은 여성팬을 몰고 다녔다(특히 이대호가 3루수로 활약하던 시절 박기혁이 책임져야 할 수비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제 어느덧 서른보다 마흔에 가까운 노장 선수가 됐지만 박기혁은 올해도 촘촘하고 탄탄한 수비로 kt 내야의 가장 깊숙한 지역을 책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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