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언젠가 방송에서 한 남성 연예인이 동성 친구로부터 고백을 받은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이야기 자체는 딱히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고백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그는 집으로 가서 '한 대야를 토했다'고 언급했다. 물론 어린 시절의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에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시간이 흐른 후 그 이야기를 하며 낄낄거리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고백을 한 당사자는 어떤 심정일까 걱정되었다. 용기를 내 전한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웃음거리가 되는걸 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사람들은 보통 사랑을 경험하는 방식이 보편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짝사랑'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루지 못한 일방적 사랑을 다룬 영화나 노래는 시간이 지나도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보여주는 서사는 표현 방식만 다를 뿐 대부분 비슷하다. 자신을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초조함, 돌아오지 않는 애정을 쏟아 붇는데서 오는 고통,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간절함과 좌절감 등. 사람들은 이런 식의 짝사랑을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보편적인 과정이라 전제한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애틋함에 공감하곤 한다.
보편적이지 않은 '짝사랑'의 경험그러나 대부분의 모든 인생의 일이 그렇듯, 애정 또한 보편적인 경험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조건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사랑 역시도 천차만별의 이야기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가령 어떤 고백이 마주하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미안함이지만, 어떤 고백에는 '어떻게, 네가 감히'와 같은 반응이 돌아오곤 한다. 후자의 반응은 고백을 한 사람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 열악하거나 혹은 사회적 자원이 전무할 때 마주하기 쉽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사랑이 금기의 대상일 때는 이루 말할 것도 없다.
가령 이성애자에 대한 동성애자의 사랑이 그렇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생각보다 빈번히 일어난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 감정이라는 것이 절대로 내가 정한 조건 안에서만 흐르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식의 사랑에서 이들이 '거부'만을 마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토를 한 대야'를 하는 수준의 강렬한 혐오를 마주한다. 어떤 이들은 짝사랑의 실패에서 좌절감만을 맛볼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거기에 더불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재확인하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통해, 스스로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로 치부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슬픔'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자기 삶을 저주 그 자체로 느낀다.
누군가의 사랑이 '혐오'의 대상이 될 때